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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 Sep 09. 2023

할아버지의 수염은 어디에 있었나?

생각의 독 

수염이 아주 긴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린 꼬마아이가 "근데 할아버지는 주무실 때 수염을 이불속에 넣고 주무세요, 아니면 이불 밖으로 내놓고 주무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글쎄다. 아무래도 생각이 나질 않으니 할아버지가 오늘 저녁에 한번 자보고 얘기해 주마.."

그날 저녁 할아버지는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이불을 덮고 누워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리 생각해도 수염을 이불로 덮었는지 이불밖으로 내놓았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수염을 이불 안에 넣어봤다가 다시 내놓아봤다가 어떻게 해봐도 그전 잠자리에서의 수염의 위치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큰일이네.. 내일 꼬마가 물어오면 답을 해줘야 할 텐데 어쩌지?"

고민을 하고 또 하느라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다음날 눈을 떴습니다.


얼마 전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저 이야기를 들으며 과연 '할아버지는 수염을 어떻게 하고 주무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수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 아닌가... 중요한 건 아무 의미도 없던 하나의  습관 같은 행동이었을 그 일에 그때부터 별 의미 없는 고민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민을 하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그러다가 그 고민에 몇 겹의 생각이 더해지고 또 더해지면 그 일은 당장에라도 일어날 것 같은 현실이 되고 맙니다.


언니가 작은 분식집을 오픈하기로 결정하고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가게를 잠깐이나마 운영해 봤던 경험과 몇 년 후에 있을 아파트 분양에 필요한 돈을 조금이라도 마련해 보겠다는 강한 신념이 합해져서 언니의 마음을 부산하게 만들었나 봅니다.

50kg 도 안 되는 작은 체구의 언니가 - 학창 시절부터 몸이 약했던- 그 힘든 소위 음식점을 한다고 하니 

동생의 마음으로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물론 20대의 끄트머리에 있는 조카와 함께라서 큰 용기를 내었다고 하지만 겨우 직장이나 조금 다녀본 조카가 얼마나 서포트를 해줄 수 있을지 마음이 안 놓이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지역에 살면서 직장까지 있는 내가 언니를 도울 수 있는 건 마음뿐이니 자면서도  괜스레 눈이 번쩍 하고 떠지는 것이 그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 사업한다고 고생고생 했던 형부도 이제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아이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제 나름의 삶을 살고 있으니 많이 풍족하진 않지만 지금처럼 마음의 여유를 느끼며 노년의 삶을 맞이하길 바랐었는데 언니의 생각은 달랐을 겁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아들과 딸, 현 상황에서 그려봤을 때 그리 여유 있을 것 같지 않은 노후생활, 그러다 혹여 자식들에게 부담이 될까 걱정하다가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마지막 사활을 걸어보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문득, 위의 얘기 속 할아버지처럼 지금 내가 그러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불로 수염을 덮었는가 안 덮었는가 는 깊게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는, 어떤 문제도 일으킬 수 없는 그저 평범한 잠자리에서의 행동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장사가 잘 될까? 투자한 돈을 잃으면 어쩌지? 언니가 그 체력으로 버텨낼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루종일 하고 앉아있어도 결코 답을 찾을 수 없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거리밖에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알면서도 쉽사리 멈추지 못하는 것 이 '생각'이란 것이고 생각이 많아지면 그만큼 고민의 무게도 커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많은 분 들이 경험해 보셨겠지만 대부분의 걱정거리들은 그저 기우에 지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나 어떤 일을 결심한 후에 하는 너무 많은 생각과 신중함 은 오히려 생각의 폭을 협소하게 만들고 나아가서는 제대로 된 추진력을 발휘하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하는 불씨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지나온 시간 속에 두려움과 부족한 용기로 인해 타협했던 안전한 선택들이 지금 나의 현재 속에도 분명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으며 결국은 나의 인생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I'm looking for my way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존재합니다. 

그 길이 시간을 단축시켜 줄 편하게 잘 뚫린 고속도로건, 먼지 풀풀 날리며 엉금엉금 기어가는 비포장 도로건, 그것도 아님 낯선 지표 속에서 어딘가에 있을 이정표를 찾기 위해 이길 저 길을 헤매 다니는 지도에도 없는 나만의 길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결국 그 길을 돌아 돌아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하게 됩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현재를 살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우리에게 정해진 길 이란 것은 없다고.

이제 그만 고민하고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해 그냥 한 발을 떼면 된다고.

잠시 잠깐 길을 잃고 미로 속에서 헤맨다 해도 그 시간들은 결코 헛되지 않을 거라고 말입니다.


오늘은 이런 첫걸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따스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산책길에서, 가슴이 따듯해지는 한 잔의 여유 있는 찻잔 속에서, 또 누군가가 편하게 풀어놓은 이야기 책 속에서, 얘기가 통하는 오랜 친구와의 시답잖은 수다 속에서 나만의 길을 찾아 떠나는 그런 하루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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