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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 Sep 08. 2023

내 친구 사랑해!

가을에 여행 가자 친구야~

명이나물, 파김치, 깻잎김치, 옥수수 등 대여섯 가지 반찬을 친구에게서 건네받았다.

여느 친정엄마들이 시집간 딸들에게 해주듯이 만들어온 반찬을 네모각이 반듯하게 잡힌 반찬통에 종류대로 담으면서 친구의 멋 부리지 않는 마음을 닮은 비닐봉지에 담아져 온 반찬들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났다.

내가 좋아하는 파김치 한 개를 입안에 넣고 너무 맛있다고 다음에 또 챙겨주라며 고마운 마음에 뻔뻔함을 보태어 메시지를 보냈더니 가까이 사니 얼마나 다행이고 좋냐 는 답변에서 다른 사람 챙기기 좋아하는 친구의 후덕한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결혼을 한 지금까지 거의 30여 년의 세월을 함께해 온 우리는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서로의 목소리만 듣고도 그 음성이 주는 마음의 상태를 알아채고, 어떤 날은 남편욕을 같이해주면서 흥분한 마음을 주체하다 못해 우리끼리 어디 며칠 여행이나 훌쩍 가서 남편들 애먹이자고, 또 어떤 날은 큰 아들만 좋아해서 딸들이 하는 소소한 효도는 입에 발릴소리도 안 되는 아들만 편애하는 친구의 친정엄마 흉을 보다가, 그럼 엄마전화 며칠 받지 않는 것으로 복수하라고 조언 같지 않은 조언을 해주면서 결국은 원래의 사람 같은 모습을 되찾아가는 우리는, 서로에게 참 소중하고도 가족 같은 존재이다.


같은 직장의 동료로 처음 만나 고향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조금 더 친밀해졌고 왠지 모를 괴리감이 느껴지던 까칠한(나에게는) 서울사람들과 달리 서로 통하는 게 많았었다.

어느 해의 크리스마스이브날 회사 근처 전철역의 포장마차 앞에서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 몇 잔을 들이켰던 그날이 우리가 오늘까지 함께해 올 시간들의 서막을 열어줬던 첫날이었던 것 같다.

그날 술을 처음 마셔봤던 친구는 꾸준히 주량을 늘리더니 지금은 퇴근한 남편과 맥주잔을 때로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부부간의 애틋한 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으니 무엇이든 배움의 결과가 좋았다면 비록 그것이 술이라도 훌륭한 스승의 역할을 제대로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서울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퇴근길 그 겨울이 다 가도록 녹지 않던  얼음판이 높은 건물들 사이에서 빛나던 좁은 골목길을, 차려입은 옷매무새도 무색하게 어기적어기적 걸으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도착하면 화려한 조명이나 깔끔하고 아기자기하게 꽤 값나가는 세간살이는 없는 단출한 집이지만 하루의 피로를 씻어낼 만큼 의 얘깃거리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히려 그 추운 서울의 겨울을 고독해하면서 즐겼고 처마밑의 고드름이 녹아내리는 어느 따듯한 날에는 겨울이 다 갔다며 서운해하기도 했다.


여행을 좋아했던 우리는 어느 밤 갑자기 겨울바다가 보고 싶었고 낼 새벽이면 경포대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며 늦은 밤 서울을 출발해 자동차의 불빛 말고는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암흑 같은 대관령 고개를 두려움도 없이 굽이굽이 넘었다.

그때는 내가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얼마 되지 않았었고 복잡해서 빨리 달릴 수도 없던 서울거리를 겨우 출퇴근만 하던 때였는데 무엇에 씌었는지 머릿속에 겨울바다만 떠올랐고 앞뒤 잴 것도 없이 그런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지금이야 대관령고개에 터널이 뚫려서 그런 아찔함도 없겠지만 다음날 날이 밝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몇 번이고 철없었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천지신명께 감사의 말을 수도 없이 나불거리면서 이십 대 청춘이었기에 가능했던 우리의 무모함에 간장이 서늘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양으로 음으로 함께했던 친구가 결혼을 안 하게 되면 같이 늙어가자던 우리의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먼저 깨고 결혼을 했고 몇 년 뒤 우연이라기에는 필연같이 친구가 살고 있는 지방의 도시에서 까칠하게 살고 있던 남편을 만나 나도 결혼을 하였다.

친구와  같은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남편은 친구에게 그저 고마운 사람이 되었고 어찌 됐건 이 정도의 사연이면 우리의 인연이 질기디 질긴 댕댕이덩굴보다 못할게 뭐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 친구가 어제저녁 늦게 문자를 보냈다.

'낼 아침에 한 바퀴 또 돌까?'

'신나게 먹었더니 2킬로가 붙었어'

가끔 주말아침이면 어느새 중년을 훌쩍 넘어 아침잠도 없어진 우리는 들로 산으로 때로는 눈 쌓인 등산길로 또 어느 쌀쌀한 새벽 턱밑까지 끌어올린 이불밖으로 문득 배어 나온  쓸쓸함이 사무칠 때도 망망대해 바닷가로 핸들을 돌린다.

지금은 나보다 더 터프하게 운전을 잘하는 친구가 조수석에 앉아서 풍경보기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운전대를 잡는다.

내성적인 성향이 다소 있어 먼저 나서기를 주저하는 나에게 친구는 대부분의 E스러운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무수한 것들을 세심하게 들여다봐준다. 

항상 곁에 있어 가끔씩은 무심한 우리지만 그래도 그 무심함 속에 내장되어 있는 서로의 존재는 남편도 꼼짝 못 할 한마디를 건네면서 정리가 될 만큼 어마무시한 힘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내 친구보다 날 더 잘 알아?"

"나하고 아직 30년 지기도 안된 주제에"

오늘은 친구가 챙겨준 반찬들로 소박하지만 감칠맛 나는 저녁식탁을 차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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