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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 Sep 07. 2023

마음에 열정이 쌓이는 나이

나이만큼의 열정을 가져보자

"요즘 그 아저씨가 안 보이지?"

"그러게... 이제 지겨워서 하기 싫어졌나 보다."

저녁 산책길에 나와 남편이 나눈 대화내용이다.

전원주택에 살기를 희망하지만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아 저 멀리 M산 정상이 보이는 - 앞동에 가려져서 확 펼쳐진 능선의 view는 아닌 - 아파트 동을 배정받아 살기 시작한 지 4년 차.

그런 우리가 퇴근 후 저녁을 챙겨 먹고 아파트 단지 주변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상가 골목골목이며 시에서 조성 중인 주민 휴식공간 등 이곳저곳을 이런저런 수다를 떨면서 배회하는 것으로 하루의 저녁 루틴을 시작한 지도 4년 차에 접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불쑥 어디선가 색소폰 연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면서 무작정 걷던 느린 발걸음에 조금씩 경쾌한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난 그 아저씨는 날씨가 좋은 날엔 인공폭포 앞 데크를 무대 삼아 폭포에서 쏟아져내리는 물줄기보다 더 힘차고 맑은 소리로 ,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 천변 길 반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 생겨난  터널입구에 서서,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과 노트북의 화면에서 흐릿하게 번지던 약한 불빛에 춤추듯 넘실대는 악보를 연신 들여다보며 연주를 이어나갔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아름다운 파마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면서 격정적으로 연주하던 Kenny G 아저씨의 연주장면을 어린 시절로부터 소환하기도 했다.

되게 멋진 연주소리를 연상하시겠지만 사실, 60대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의 색소폰 부는 소리는 우리의 귀를 호강시켜 줄 만큼의 것 은 아닌 , 미안한 말이지만 오히려 초보자에 가까운 연습생 수준의 것이었다고 털어놓고 싶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그린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빗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

아저씨가 요즘 맹연습하고 있는 7-80년대 유행했던 윤연선의 '얼굴'이라는 곡이다.


'얼굴'의 작사가 심봉석과 작곡가 신귀복은 서울 동도중학교 교사였다.

어느 날 교무회의 중, 교장선생의 지루한 훈시에 무료해진 생물교사 심봉석은

메모지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동그라미를 그리려다 그만 교제 중이던 연인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고,

애틋한 마음과 그리움이 보태져 한 편의 시를 끄적이게 된 것이다.

옆 자리의 음악선생 신귀복에게 시를 내밀었고, 신 선생이 곡을 만들었다.

두 선생은 먼저 학생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고 구전되다가 윤연선이 1975년에 취입을 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네이버에서 발췌한 글-


아저씨가 연주를 시작하면 나도 그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하지만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얼굴' 맨 첫 줄에서 더 이상 진도를 나가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가끔씩 연주 곡 은 달라졌지만 다른 곡이라고 해서 듣기 좋을 만큼의 수준이 느껴지는 그런 것 은 아니었다.

아저씨의 연주실력은 쉽게 늘지 않고 점 점 추워지는 날씨에  손 이 곱아서 어떻게 키버튼을 누를 수 있을까 쓸데없이 나는 또 마음이 쓰이곤 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봄... 어느 곳이나 벚꽃이 만발하다 못해 눈처럼 날리고 이에 질세라 바람에 날려온 황사먼지 또한 주차된 차들의 지붕에 뿌옇게 쌓여가고 있지만 베란다에서 보이는 앞 골목길 상가 건물들 사이사이에서 스며 나오는 따듯한 느낌의 햇살이 제법 아름답게 보이는 음영을 만들어 내는 것도 이미 찾아온 봄이 주는 자연의 선물 아닌가 싶다.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동네어귀로 저녁 산책을 시작했지만 저번주도 이번주도 아저씨의 연주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남편은 아저씨가 스스로 지쳐 연주를 포기했을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 뭔가를 시작한다는 건 일취월장하지 않는 실력에 대한 초조함과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이 힘든걸 내가 왜 시작했을까 하는 순간을 견뎌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의 멤버 음악인 김태원 씨가 음악에 미치지 않고 몸을 반쯤만 담고서는 끝까지 갈 수 없다고 어느 예능프로에서 말했다.

오죽하면 1만 시간의 법칙이란 말이 생겨났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전문적인 한 가지 일을 제대로 해내기까지는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겠는가.

나이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못한다는 것은 핑계라고들 하지만 실제로 나이가 벽(wall) 이 되어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언젠가는 온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나이가 주는 초조함이나 조바심을 견뎌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오늘도 역시나 뿌연 M산을 바라보며 '얼굴'의 첫 소절을 마무리하지 못한 아저씨가 다시 여느 길 모퉁이 한편에서 자리를 잡고 연주를 시작해 주기를 바라본다.

그 연주소리에 따라 나도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얼굴..."을 끝까지 완창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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