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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 Sep 05. 2023

주연(lead actor)은 오리!

마음을 나누다.

입원으로 며칠간 집을 비우신 어머니의 부재로 혼자 계시는 아버님을 뵈러 역시나 부재중인 남편 없이 혼자 집을 나섰다.

내가 사는 J시에서 K 시를 지나 B 군으로 이동해야 하는 1시간여의 지방도로는 들어서자마자 가을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느끼게 했고 산아래로 펼쳐진 들판은 곁눈질을 하지 않고 운전에만 집중할 수 있게 나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오랜 장마에도 기세가 꺾이지 않은 키가 제법 자란 논의 벼만큼이나 여러 빛깔로 밭을 수놓은 각양각색 작물들이 한풀 꺾인 여름햇살 속에서 막 불기 시작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자유자재로 살랑거리고 있었다.

매일 보는 산과 들이 그리 좋을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자연 보기를 금 같이 하는 나는 뼛속까지 사무친 시골태생이 맞다.

시원하게 탁 트인 너른 들판에 어울리는 가을스러운 노래들을 듣다가, 평생을 논 밭과 함께하신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을 또 어김없이 하면서 코 끝을 시큰거리다가, 조관우 님 의 '나 가거든'이란 노래에서 미처 추스르지 못한 감정의 눈물 한 방울을 또르륵 흘리며 그렇게 홀로 주책맞은 모노드라마를 찍어대며 드디어 아버님댁에 도착했다.

아버님과 함께 로컬푸드에 가서 몇 가지 반찬거리를 사고 무화과를 먹고 싶다는 내 말에 아버님은 농장으로 차를 돌리셨다.

아버님한테는 놀이터 같은 농장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즐길거리가 참 많다.

지금은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오디, 복분자, 사과대추, 구기자  토마토, 기억에서도 가물가물 해진 여러 채소며 과일나무를 대신해 블루베리, 감나무, 헛개나무, 무화과 등 은 여전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차를 타고 가며 아버님은 여러 가지 농사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를 말씀해 주신다.

고구마의  품종으로는 하얀색, 노란색, 자색, 정도가 있으며 그 색에 따라서 맛의 차이가 다르고 점성에 따라 고구마 표면의 끈적임이 차이가 난다고, 또 아버님이 심으신 무화과는 '바나네'라는 품종으로 청무화과로 불리며 단맛이 강하고 여름이 지난 후까지도 수확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활기 가득한 표정을 하시고 설명하신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또 이것저것 아버님께서 좋아하실만한 주제를 꺼내 대화를 이어나간다.

며칠 동안 어머님의 부재로 느끼셨을 적적함을 그렇게라도 잊으시길 바라며 얘깃거리를 만들다가 나는,

"아버님 오리탕 좋아하시죠? 집에 가는 길에 오리 한 마리 사가지고 가요."

생각도 없이 일을 저지르고 만다.

한 번도 끓여본 적 없고 심지어 외식으로도 자주 먹지 않는 오리탕을 내가 끓이겠다고 큰소리쳐놓고 '어떻게든 하면 되겠지'라고 슬며시 속으로는 꼬리를 내렸다.

먼저 압력밥솥에 말린 표고버섯, 잘게 썬 마늘, 통양파, 대파, (말린 대추, 황기 등 은 찾을 수가 없어서)를 넣고 약 30분간 푹 삶았다.

압력밥솥의 김을 빼는 인고의 시간을 버티고 여분의 냄비를 준비해 푹 고와진 오리에서 살코기만 발라서 다시 끓이기를 반복, 소금 간을 하고 약간의 msg를 첨가한 후 들깻가루 푹 푹 두어 스푼을 넣어서 간을 보니 '어라?' 제법 맛이 난다.

아마추어가 끓여낸 오리탕 치고는 프로의 냄새가 조금은 베어나는 국물 한 숟가락을 맛보며 스스로가 뿌듯한 마음에 아버님과 눈을 마주치며 배시시 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얼렁뚱땅 끓여낸 오리탕을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파김치, 오이, 아삭이고추, 황태볶음 등으로 식탁을 차려드렸고 어느새 들판 가득 붉게 물든 노을을 마주하며 돌아오는 길은 몸은 비록 노곤하지만 '나 오늘 제대로 한 건 했다'는 자부심이 자꾸만 마음을, 기분을 사부작 거리게 만든다.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필요한 것들을 챙겨드리는 것도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 하는 덕목 중 하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지나침이 없어야 하는 것은 소소한 일상을 함께 나누며 건네는 말 한마디라고 생각한다.

연세가 이미 드신 부모님이 가지는 세상에서의 관심사는 하루가 멀게 쏟아지는 매스컴의 사건사고 보다 자식들에게 일어난 하루하루의 사소한 일상생활에서의 사건 사고가 더 큰 의미이고 관심의 대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나와 아버님이 함께한 몇 시간 동안 오리탕은 어느 멋진 연극에서 열연한 주인공 보다 더 큰 역할을 제대로 해주었다.

부모님과 함께 할 무대에서 주인공 역할을 할 주연을 찾아보자.

그 어떤 것을 주인공으로 삼던 그것은 당신과 부모님이 함께 연출한 연극무대의 대미를 틀림없이 커튼콜로 장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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