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기다리며...

기억하고 싶은 그때

by 피노

한참 동안 전화기를 들고 있었지만 끝내 너는 받지 않는다.

핸드폰 번호가 바뀌었다면, 더 이상 수신이 되지 않는 번호라든가, 아니면 바뀐 번호로 자동 연결해 준다던가 할 텐데 정말 아날로그적인 너답게 어떠한 행동도 취해지지 않은 전화는 단 한마디의 멘트도 달지 않은 채 울려대는 것 만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처음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하고 몇 초 동안은 너의 목소리를 기대하며 설레었다가, 10초 정도가 지나자 의아했다가, 약 30초를 넘어서자 역시나 하고 체념하였다.

두어 달 전에도 나는 너에게 전화를 걸었고 부재중인 너의 안부를 묻지 못했다.

그래도 그때는 내 번호가 수신되었으니 다시 전화를 해오겠지 하며 기다렸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는 틈틈이 전화벨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걸려오는 전화라고는 반가울 리 전혀 없는 스팸전화 들 뿐이었다.




나의 이십 대.

혜화역 2번 출구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은, 찬란했지만 희망과 절망의 시절을 나와 함께 견디며 호흡하고 따듯하게 보듬어 주었던 둥지 같은 곳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곳에서 많이 우울했지만 명랑했고, 외로움으로 인한 고독을 배워가며 삶 속에는 항상 밝음과 어두움이 함께 공존하지만 그것은 나를 성장시키는 불가결한 인생의 흐름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동숭동 그 어느 골목에도 나의 추억이 묻어있지 않은 곳 은 없으며 그곳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 은 흐릿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나의 내면에 쌓여있던 세상을 향한 삐죽한 질문들에 조금씩 나다운 답을 내놓을 수 있는 단단한 초석이 되어 주기 시작했다.


마음이 무단히 헛헛했던 날, 노을 내리던 마로니에 공원 야외무대에서 들었던 김광석의 노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는 아직 제대로 된 사랑 한번 해보지 못한 나에게, 떠나버린 그리운 이들의 창문 앞을 오랫동안 서성이게 만들었고 이런 날 들이 하루하루 늘어간다면 이 감정을 사랑이라 불러도 좋을지 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했다.

에로스(Eros) 적이거나, 아가페(Agape) 적 사랑이 아닌 스토르게(Storge) 적인 사랑에 가까운 것이 그때의 내 감정이었음을 진짜 좋아하던 사람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랑은, 떠나버린 사람의 창문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닫힌 창문을 두드려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라는 것을.




매주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밤까지 마로니에 공원 앞 대학로 거리는 차가 다니지 않았다.

'차 없는 거리'라는 명칭은 고유명사처럼 주말 저녁 젊음들을 대변했고 90년대는 문화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날 조짐이 보였던 과도기의 시기였다.

그때 그 거리의 젊은이들은 몇 사람씩 둥그렇게 모여 앉아 밤새 열띤 토론을 하거나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했지만 이러거나 저러거나 그들은 항상 무언가에 화가 나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발길을 돌렸다.

마로니에 공원 안에는 미술관이 하나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나는 툭하면 그곳을 드나들면서 무시로 울컥울컥 대던 마음속 소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림 앞에 가만히 서있곤 했다.




그곳을 떠난 때가 언제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마로니에 공원을 지나 주택가로 들어서면 오래된 한옥집들이 즐비하게 골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자취를 하면서 주인할머니와 둘 이 살았다.

할머니는 하나뿐인 딸부부가 캐나다에서 살고 있었기에 'ㄴ' 자 모양으로 지붕을 얹은 한옥집을 혼자 관리하며 살고 계셨고 나는 막 낯선 서울살이를 시작한 터라, 우리는 가족은 아니었지만 은근히 속으로는 서로를 의지 하면서도 겉으로는 표 내지 않고 적정한 거리를 잘 유지하며 무심한 척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마당 한편에 자리 잡은 작은 창고에서 나오시다가 머리를 크게 다치셨다.

머리에서 피는 줄줄 흐르고 혼자 있던 나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할머니를 큰길까지 부축해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 후로 몇 차례 더 병원을 동행했고 일요일이면 교회에 다니시던 할머니를 모셔다 드리곤 했다.

얼마 후 캐나다에서 할머니의 딸 이 들어왔고 그 집에서 며칠을 같이 지낸 후 할머니와 함께 캐나다로 떠났다.

나에게 그 커다란 집을 맡기고.

한 달 즈음 지났을 때 할머니의 딸이 나에게 엽서 한 장을 보내왔다.

그동안 할머니를 돌봐주어서 고마웠다고, 한동안 할머니는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헛헛한 말과 함께.

한참 동안을 혼자 그 집에서 지냈다.

불야성 같던 마로니에 공원의 물리적 경계를 지나면 고즈넉한 밤의 풍경이 드리워진 골목길이 나를 한층 외롭게 만들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할머니의 친척이라는 젊은 부부가 그 집으로 이사를 들어왔고 그 무렵 나는 그곳을 떠나왔던 것 같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비 내리던 새벽,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추위의 떨림으로 사정없이 부딪혔던 치아의 딱딱거림을 내 의지로 멈출 수 없었던 그 순간이,

햇살 좋은 어느 날 이층 카페에서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기분 좋게 스며들었던 그 공간의 봄향기가,

유난히 추웠던 겨울날 따뜻한 누군가의 마음과 함께 건네졌던 군고구마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말랑말랑해졌던 나의 마음 이, 시공을 초월하여 그때를 향해 달려간다.


이 모든 것들을 너와 나는 함께 하며 지나왔다.

결코 짧지 않은 그날들에 우리가 공유했던 많은 일상들이 그리움이며 애틋함이기에 너를 그 안에 넣지 않고서는, 조연들은 난무하는데 정작 주인공이 빠진 불완전한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나의 스토리 또한 완성될 수 없다.

나의 이십대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 역할을 멋지게 해 준 너로 인해 나는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숨은 1cm만큼의 특별함이라도 끄집어낼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나는 조금 더 빛날 수 있었다.


설령 서로 다른 기억의 회로가 너와 나의 의식의 흐름을 방해했다 하더라도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바래지고 퇴색되어 결국은 닳아 없어지는 존재가 결코 될 수 없음을 잊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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