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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사초 Aug 26. 2023

# 반려견과 함께 하는 산책

시간적 경제적 자유인의 일상

살맛 나는 삶을 누리는 방법은 뜻밖에도 단순하다.

벗들과 우정을 나누라.

향기로운 음식을 먹고 즐거워하라.

훌륭한 예술 감상의 기회를 놓치지 마라.

숲 속을 걷고 숙면을 취하라.

일상의 조촐한 기쁨을 배제하면 행복도 줄어든다.

               - 장석주,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중에서 -



직장을 다닐 때 명함을 가진 적이 없다. 공무원이란 신분은 어디 가서 명함을 내밀 만한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은퇴를 했으니 명함이 더더욱 필요 없어졌지만, 만약 명함을 만든다는 가정하에 어떤 말을 넣을 것인지 고민한 적이 있다. 대부분은 다니는 회사의 이름과 직책 정도를 기재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직장이 나의 정체성의 일부인 건 맞지만, 전부를 드러내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그래서 나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단어를 찾아 오래 고심했다. 여러 날의 심사숙고 끝에 내가 찾은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산책가'였다. 산책이 뭐 그리 대단하길래 명함에까지 올리느냐 되물을 수 있다. 하지만 매일 두 번씩, 하루에 한 시간 이상 규칙적인 산책을 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산책이 지금의 나를 가장 적합하게 드러내는 말이라면 충분한 답변이 되지 않을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정도의 이유로 산책을 한다. 하나는 건강을 회복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산책이고, 다른 하나는 사색과 사유를 위한 산책이다. 건강을 위한 산책은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반면, 사색과 사유의 산책은 보통 철학자나 사상가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다. '순수이성비판'으로 알려진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코스로만 산책을 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산책이 얼마나 규칙적이었으면 이웃에 사는 여자들이 산책하는 칸트를 보고 시계를 맞췄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평생 산책을 빠진 날도 딱 이틀뿐이었는데, 루소의 '에밀'을 보다가, 그리고 프랑스 시민 혁명의 신문기사를 읽다가 산책 시간을 놓쳤다고 한다. '월든'으로 유명한 자연주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 역시 날마다 산책을 즐겼는데, 그는 월든 호숫가를 거닐며 숲과 꽃, 나무, 그리고 숲 속 동물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두 가지 산책은 걷기의 강도와 속도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건강을 위한 산책의 경우, 운동이 목적이기에 등에 땀이 베일 정도의 운동량을 요한다. 그래서 일반적인 걷기에 비해 많은 힘을 실어야 하고, 속도도 빠르다. 그래서 혹자들은 이를 파워 워킹(walking)이라고도 한다. 이에 반해 사색이나 사유를 위한 산책은 그 속도가 확연히 느리다. 몸에 힘을 실지도 않고, 땀을 유발하지도 않는다. 걷기가 목적이 아니라, 사색이나 사유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걸음이 느릴 뿐이지, 머릿속의 두뇌는 파워 워킹(walking) 못지않게 사고의 워킹(working)이 일어나고 있다.   






나의 산책은 위의 두 산책과는 조금 다르다. 혼자 하는 산책이 아니라 반려견과의 산책이기에 그렇다. 원래부터 산책을 좋아하거나 즐긴 것은 아니다. 반려견과 함께 살면서부터 시작하게 된 산책이다. 굳이 두 산책 중 하나에 포함시키자면 후자에 가깝다. 반려견을 위한 산책이라 그 속도가 아주 느리고, 강도도 약하기 때문이다. 산책으로 인해 땀이 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반려견의 노즈워크가 목적이기에 어떤 장소에서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멈춰있기도 한다. 하루에 두 번, 오전과 저녁 시간에 주로 산책을 한다. 사람이 많은 곳이나 차가 다니는 곳은 일부러 피한다. 주로 집 가까이에 있는 작은 숲을 걷거나, 인근에 위치한 인적 드문 공원을 찾아간다.



반려견과의 산책은 색다른 즐거움이 있다. 목줄을 메고 앞서 가는 반려견의 꼬리는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마에스트로 같다. 꼬리를 연신 지휘봉처럼 흔들며 앞서 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오늘 하루 나를 무겁게 짓누른 근심을 잠시나마 잊게 한다. 때론 마약 탐지견이 된 듯, 수상한 냄새를 쫓아 코를 땅바닥에 박고 탐색 모드에 들어가기도 한다. 메뚜기나 방아깨비 같은 곤충을 발견하면 사냥개 모드로 돌변해 어떻게든 잡아보려 신나게 쫓아다닌다. 그러다 너무 좋은 냄새를 발견하면 어깨와 등부터 땅바닥에 비벼대며 온몸에 그 냄새를 묻히기도 한다. 물론 가끔은 이상한 것을 묻히고 와 집사를 곤욕스럽게 하기도 하지만, 그런 냄새를 묻히고 집사 앞에 와 신나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차마 화를 낼 수가 없다.



비가 오는 날에도 예외는 없다. 비옷을 입고 우산까지 챙겨 나서지만, 여지없이 바지가 젖고 신발엔 물이 찬다. 젖은 신발의 축축함과 반려견의 목줄, 배변 봉투, 우산까지 챙겨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우리의 산책을 말릴 순 없다. 반려견은 비를 개의치 않는다. 비가 오는 날이면 오히려 가라앉은 공기가 후각을 자극하는지 노즈워크에 더욱 골몰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빗속 산책의 번거로움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내리는 비 덕분에 숲길을 걷기가 수월해진다. 걸을 때마다 흙먼지가 일던 숲길 곳곳이 비로 인해 차분해졌다. 평소 산책하는 사람들로 붐비던 숲도 오늘만은 오롯이 우리의 차지가 된다.

              


반려견과 함께 산 지 7년이 넘었으니, 산책을 다닌 지도 7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내가 반려견을 산책시켜 주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반려견이 없었다면 과연 지금처럼 매일 산책을 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아마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내가 아니라, 오히려 반려견이 이제까지 나와 아내를 산책시켜 주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 기특한 녀석이 7년 넘게 우리의 건강을 책임지는 전담 트레이너가 되어, 급여도 받지 않고서 묵묵히 우리를 데리고 다녔던 것이다.(밥값을 한 것인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아내와 나를 위해 신선한 바깥공기를 마시게 하고, 숲의 초록을 보게 한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게을러지는 몸을 움직이게 하고, 줄어가는 다리의 근력을 길러주고 있었던 것이다.  




봄, 가을의 산책도 좋지만, 한겨울 산책을 가장 좋아한다. 영하의 온도와 매서운 칼바람이 산책을 방해하지만, 우리의 산책 의지를 꺾진 못한다. 추위와 맞서기 위해 이중 삼중으로 껴입는다. 반려견에게도 겨울과 맞설 패딩을 입힌다. 귀가 시리도록 차가운 기온에, 머릿속이 서늘하게 비워진다. 서늘한 상쾌함이다. 잡생각이 끼어들 틈조차 주지 않는 추위 덕분에 모든 걸 잊고 산책에 집중한다. 모기나 진드기 같은 벌레가 없는 것도 겨울 산책이 좋은 이유다. 여름 산책을 유난히 싫어하는데, 무더위와 함께 습도가 높은 이유도 있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모기 탓이 크다. 반려견에게 진드기가 달라붙는 것도 유독 여름이 심하다. 하지만 겨울엔 어디를 가더라도 벌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산책이 좋은, 가장 큰 이유는 아내와의 데이트이기 때문이다. 결혼 20년이 다 되었지만, 여전히 손을 맞잡고 걷는다. 자연스레 대화도 많이 한다. 반려견의 행동에 함께 웃고, 반려견의 입장이 되어 말을 주고받기도 한다. 어제의 피아노 연습이 어떠했는지, 피아노 모임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전해온 소식은 뭔지, 오늘 점심에는 무슨 메뉴를 만들어 먹을 것인지 이야기한다. 새로 오픈한 카페의 위치와 메뉴, 그리고 사람들의 평판에 대해, 화물차를 그만두고 싶다면서도 일 중독에 그만 두지 못하시는 아버지에 대해, 새로 시작한 탁구에 한껏 빠져 복지관과 사설 탁구장 두 곳을 드나들며 신나게 탁구를 배우시는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내가 쓰고 있는 글에 대해 주고받는다. 반복되는 서술어에 대해, 불필요한 단어나 문장의 삭제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내가 쓰기를 바라는 글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의 산책에는 늘 우리의 일상과 삶이 동행한다. 그리고 산책과 함께 풍요로워진 일상과 삶이 다시 우리를 걷게 한다.




#파이어 #FIRE #경제적자유 #조기은퇴 #산책 #반려견 #비글 #칸트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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