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ecil Apr 23. 2021

마밀라피나타파이(mamihlapinatapai)

  '마밀라피나타파이(mamihlapinatapai)'는 칠레 남부 티에라델푸에고 지역의 '야간(Yaghan)'족 원주민들이 쓰던 명사 단어로, 세계에서 가장 뜻이 긴 단어이자 내포한 의미가 복잡 미묘해서 타국어로 번역하기가 제일 난감한 단어로 1993년에 기네스 북에 올랐다. 그 뜻은 다음과 같다. 

 mamihlapinatapai: (명) 서로에게 꼭 필요한 것이면서도 자신은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어떤 일에 대해서 상대방이 자원하여 해 주기를 바라면서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하면서도 긴급하게 오가는 미묘한 눈빛

포털 사이트에서 우연히 보게 된 이 단어는 그 자체로도 신선한 충격이었는데 그 밑에 달린 댓글 때문에 완전히 박장대소해버렸다. 그 댓글은 다음과 같다. 

  저기, 조장하실 분?

정말 이런 위트가 가능하다니! 번역 전문가들도 딱 맞는 말을 찾지 못해 그대로 놔둔 단어를 한방에 해결해 버리는 말이 아닌가! 

  

 한 때 번역에 잠시 몸담고 여러 권 책 번역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가장 난감한 번역은 바로 이 모호함이 가득한 기분을 그대로 표현하는 말을 찾아 원문의 느낌을 100%에 가깝게 살려내는 작업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명확한 경우보다는 대체로 모호하고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미묘한 분위기의 긴장이 감도는 상태에 놓여 있을 때의 기분은 정말 모국어로도 표현할 길이 없을 때가 많다. 

  그런데 '저기, 조장하실 분?'이라는 말은 그 순간의 기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격하게 공감하는 느낌적인 느낌이 있을 것이다. 꼭 조장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아니어도 이런 상황은 일상에서 자주 마주하게 된다. 책임은 모면하고 싶지만 의무감은 남아서, 못한다고 말도 못 하는 다양한 상태. 이 상태에서 느끼는 그 난감하고 모호한 기분은 사실 표현할 명확한 단어가 없다. 물론 '마밀라피나타파이'도 눈빛을 표현한 명사라고 하니 반드시 기분을 표현한 것만은 아닐 테지만 오묘한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흥미롭다. 


 사실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나만은 아니길 바라는 그 복잡 미묘한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다. 그냥 책임감 있게 한다고 해버리면 모두가 좋을 텐데 덥석 손을 들기는 무섭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마음으로 고개를 숙인 채 상황이 빨리 종료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마흔이 넘어서도 이러고 있는 자신과 마주할 때, 깊은 '현타'가 온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배우고 성장했단 말인가. 분명 내가 해보겠다고 의욕적으로 손 들던 때가 있었을 텐데 어쩌다가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며 책임을 모면하는데 급급한 비겁한 겁쟁이가 되었을까.

 대체로 유치원 때는 아이들이 손을 번쩍번쩍 잘도 들고 자기가 지명되지 않으면 이내 실망하고 어쩌다 본인이 낙점되면 세상을 다 가진 눈빛으로 초롱초롱해진다. 초등학교 저학년 교실도 분위기는 비슷하다가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책임을 회피하는 분위기가 시작되고 나이의 증가에 따라 고조된다. 그냥 깔끔하게 지목을 받아버리면 되는데 선택의 순간이 되면 미묘해지는 분위기와 찝찝한 기분. 이 기분의 출처를 알면 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더 비겁해지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주로 초등학교 4학년 즈음부터 나타나는 책임회피와 주저함은 성인이 되면서 꾸준히 증폭된다. 많은 정신분석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주로 '기분'에 큰 상처를 받은 '기억'때문이라고 한다. 좋지 않은 기분으로 가득한 기억은 앞으로 닥쳐올 미래를 안 좋은 방향으로 시뮬레이션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공포를 먼저 경험하게 한다. 그러니까 내가 손들고 책임을 지는 행동을 했을 때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느꼈던 좋은 기억보다는 일을 주도하면서 발생했던 분란을 수습하거나 무거운 중압감을 느끼며 일을 마무리한 순간의 기분이 무의식의 기억에 장기 보존되어 있다는 말이다. 리더십이 출중한 성향을 타고났어도 큰 이득이 없는 일에서 선뜻 나서지 않는 이유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나름대로 외향적임에도 오랜 사회경험으로 매 순간 책임을 회피하고 '가늘고 길게 가자'며 도전을 회피하는 자신의 모습에 혀를 찬다. 그러면서 생각해보건대, '나의 그 찝찝한 기분의 기억은 언제 있었고 극복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학 때 토론 중에 교수님께 지적받고 무참히 깨졌을 때, 기획안이 쓰레기통으로 처박혔을 때, 오래 준비한 프로젝트의 공이 다른 이에게로 넘어갔을 때 등등 누구나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겪게 되는 '더러운 기분'이 나에게도 장기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특히 의견을 냈더니 '그 의견 좋다! 그럼 이 안건은 자네가 책임을 지고!' 이런 경우의 난감한 기분은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 '너 입 다물고 있어! 독박 쓴다!'라는 자아의 속 소리로 작용한다. 그러나 자주 빈번하게 그런 순간을 경험하면서 대의를 거스르고 소인배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씁쓸함이 남는다.   

  

책임을 회피하고 독박을 쓰게 된 누군가의 업무 역량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훈수를 두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절망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책임을 회피하고 비겁한 자아를 넘어서 아주 안하무인 꼰대가 되어 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묵인하기에는 아직은 너무 제정신이었다. 잘잘한 스트레스들을 관통하는 중심에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상황에 맞춰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불만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 불만의 뿌리는 책임을 졌을 때 닥쳐올지도 모르는 불안감만큼이나 엄청나다는 것을 책임 전가 후에 밀려오는 또 다른 찝찝한 기분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무턱대고 결과를 미리 예측하고 이내 포기하게 만드는 '기분'에 대한 '기억'에 굴복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아무도 알 수 없는 결과를 미리 부정으로 예측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행동은 결국 더 찜찜한 기분으로 일을 진행하는 또 다른 '나쁜 기억'을 만들어 보관하게 된다. 어쩌면 책임을 회피하게 만드는 '기분'의 '기억'보다 더 자주 빈번하게 책임을 지고, 일을 처리하고, 결과를 내 것으로 만드는 진취적 '기분'의 '기억'을 더 키우면 되지 않을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편한 기분의 지분을 낮추려면 유쾌, 통쾌, 상쾌한 기분의 지분을 늘리면 된다. 책임질 상황을 즐기고 자주 그 자리에 있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기분이 누가 해주길 바라면서 스스로를 통제할 때보다 유쾌, 상쾌, 통쾌할 수 있음을 기억하려 한다. 그러니 오늘부터라도 '마밀라 피나타 마이'와 결별을 고하고 조금 더 진취적으로 살아야겠다. 손들고 나아가면 위험이 있을 수 있지만 그만큼 세상에 나를 알리고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될 테니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나를 넘어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