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는 욕심이 없어서,,,” 입버릇처럼 한 번씩, 결혼 후 더 빈번하게 듣는 엄마의 말이다. ‘마흔 넘은 딸을 정말 그렇게 모르시나?’ 굳이 반박하진 않지만 들을 때마다 의아한 표정으로 엄마의 진심마저 의심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추억하며 꺼내신 이야기 속 어릴 적 나는 정반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3학년 음악 시간, 오르간(풍금이라고 했나) 칠 수 있는 사람? 담임선생님 질문에 자신 있게 손을 번쩍 들어 오르간 반주자로 뽑히고 말았다. 피아노를 배우고는 있었지만 교과서에 실린 노래 전부를, 악보도 없는 왼손 반주까지 자연스럽게 맞춰 칠 수준은 당연히 아니었다. 자원했으니 번복도 못하고 혼자 고민하다 다음날 바로 피아노학원 원장님께 음악 교과서 반주집을 구해달라 부탁했다고 한다. 며칠 후 ‘교사용’이라 적힌 반주집을 소중히 들고 와 체르니보다 열심히 연습했다고.
정말 그랬나? 음악 시간이면 선생님이 서 있는 교탁 바로 옆 오르간에 앉아 엉덩이가 들썩이도록 두 발로 페달을 번갈아 힘껏 밟으며 쳤던 기억은 분명히 있다. 반장 선거에 꼭 뽑히고 싶은 마음에 당시 웅변학원에 다녀 반장선거 연설문을 제공받은 오빠에게 원고를 보여달라 조르고 졸라 얻어냈다. 첫째 둘째,,, 공약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저를 반장으로 뽑아주신다면,,,’으로 시작해 끝까지 한 번의 실수 없이 연설을 마치고 스스로 의기양양했다. ‘국민학교’였던 그때, 전교생 운동장 조회가 있는 월요일이면 맨 앞에 서서 우리 반 대열이 흐트러지지 않는지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며 줄을 맞추는 건 짜릿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특권을 누리려 반장 자리를 놓치기 싫었다. 나만 특별한 듯한 착각, 치기 어린 우월감에 빠진 그때의 모습은 지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부끄럽다. 이렇게 열 살부터 명예욕, 권력욕이 넘쳤던 내가 욕심이 없다니요 엄마.
25살 첫 직장에서 영업전략팀 귀신으로 불리며 새벽 모범택시를 타고 퇴근하던 때에도 나의 욕심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인사고과 KPI에 반영되는 자격증에 물류관리사와 유통관리사가 있었다. 회사 측에서 포상금 지급마저 약속했기에 각 팀 팀장들은(본인 고과를 위해서) 팀원 모두에게 여가 시간을 활용한 자격증 취득을 독려했다. 물류관리사 자격증은 16년 전 당시에도 포상금이 3-40만원 정도였으니 만만한 시험은 아니었으리라. 평일 평균 4시간 부족한 수면을 채우는 주말이라 여가 시간은 물론 연애 상대 또한 없던 게 시험공부에는 도움 요소였다. 수능은 폭망했어도 고등학교(물론 명문고 아님) 내신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았던 암기와 벼락치기에 know-how가 쌓인 나였다. 결과는 2개의 자격증 동시 취득, 전 직원 앞에서 이름이 호명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성 비율이 높은 부서 특성으로 이해해야 했나. 입사 때부터 계속된 여직원들의 따돌림과 수군거림이 그날 이후 심해진 건 당연했다. 늘 호의를 베풀던 팀 내 남성들의 시기하는 눈빛과 태세 전환에 잠시 당황하긴 했다. 괴롭고 속상하기보단 흥 어찌나 통쾌하던지! 아, 내가 이걸 보여주고 싶어 주말 단 잠도 포기했구나. 시기와 질투의 시선을 즐기는, 나도 모르던 내 안에서 꿈틀대는 욕망을 마주했던 순간이다. 내가 원인 제공하지 않은 타인의 일방적 미움은 나를 향한 부러움의 가장 확실한 증거니까.
<어린이 행진곡> ‘도도라도 라솔파레 (C4)도(C5)도라솔파’ 독주라도 되는 듯 둔탁하고 서걱거리는 건반을 꾹꾹 눌러 네 마디의 전주를 시작하면 “발맞추어 나가자 앞으로 가자~” 친구들의 합창에 가슴이 뛰었다. ‘1호선 용산-남영역 간 사고 여파로 전동 열차 운행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출근길 객실 내 갑작스러운 안내 방송이 현재의 나를 불러온다. 더 이상 1등도, 반장도 아닌 나지만 자기 역할에 실수가 없고 완벽한 사람으로 꼽히고 싶은 욕심-인정욕구가 내 안에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스스로를 가볍게 꾸며 얻어내는 친근함보다 어렵고 거리감이 있어도 완벽한 사람이 되길 꿈꾼다. 지하철 연착으로 출근이 늦는다는 말은 핑계 같아 휴대폰과 함께 가방 깊숙이 넣는다. 지하철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1km 전력으로 달린다. 엄마 눈에 무욕의 딸은 여전히 주목받고 인정받고 싶은 그래서 더 뛰어야 하는 중년의 욕심쟁이다.
June 18,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