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으로 시작 ‘감사합니다.’로 끝맺지만 제목과 본문은 모두 다른 메일들이 업무 시작과 동시에 최신순으로 발신함을 계속 채운다. 분 단위로 추가되는 내용들을 항목별 엑셀파일에 업데이트하며 발송할 문서는 양식에 맞게 작성한다. 정해진 패턴의 반복적인 일임에도 바깥공기 마실 새 없이 퇴근 시간을 맞는 게 매번 신기하다. 여러 페이지의 받은메일함을 열고 피드백 안 한 메일은 없나, 공유하지 않은 내용은 없나 마지막으로 훑어본다. 유난히 서늘한 사무실 안, 키보드 위에 올린 손끝이 시려 자꾸만 주먹을 쥐었다 편다. 춘분도 지나 제법 따스한 봄기운이 느껴진다던데 이른 아침 출근길 여전히 두툼한 니트와 코트를 챙겨 입은 나만 겨울인가. 한낮엔 다들 이미 가벼운 봄 재킷에 살랑거리는 블라우스 차림이겠지.
직원 모두가 정시 퇴근한 오후 5시부터 나의 또 다른 업무를 시작해야 하는 날이 있다. 주요 업무에는 밀려났지만 놓치면 안 되는 일, 청년내일채움공제, 중소기업취업자소득세감면 등,,, 특정 직원에 한한 지원 업무이다. 사무실 가장 깊숙한 안쪽, 벽을 등진 내 자리지만, 근로계약서 급여대장 같은 사내 일급 보안 문서를 모니터에 띄워놓아야 하기에 모두가 퇴근한 혼자만의 시간이 편하다. 참여자별 지원 시점도 기간도 모두 다른, 분기(혹은 반기)마다 갖춰야 하는 증빙서류가 7~8 항목은 가뿐히 넘는다. 관련 자료를 제공하는 사이트도 제 각각이라 은행인터넷뱅킹, 4대사회보험 관련, 해당 지원사업체 홈페이지 여러 창을 열고 필요한 자료를 출력한다. ‘모든 서류를 스캔하여 하나의 PDF파일로 보내십시오.’ 담당직원의 간단 명료한 요청사항은 빨간색 고딕체로 말하고 있다. 수백 명의 자료를 취합, 확인해야 할 담당자의 고충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일일이 한 장씩 스캔하고 있자니 짜증이 난다. “엄마 아직 회사야? 얼굴 보고 잘 거란 말이야, 언제 오는데?.” 아이의 전화까지 걸려오면 퇴근길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자랑할 만한 복지란 없는 회사에서 직원(특히 청년)들에게 제공되는 혜택 하나를 챙기고 있다는 뿌듯함은 위안이기도 하다. 당당히 요구하고 즉각적으로 지원해 주는 분위기 형성에 일조한다며 스스로 기운을 낸다. ‘세상 좋아졌네. 우리 때는 그런 것도 없었어.’ 부러움을 가장한 비아냥대는 말을 들으면 누워있던 솜털마저 뾰족뾰족 불편함을 못 참고 일어서는 듯하다. ‘젊으니까 고생도 해보는 거지.’ 아픔과 좌절이 청년들의 필수 과정인 듯 쉽게 내뱉는 말들을 참아야 했던 내 서글픈 기억은 더 이상 공감의 소재가 아니길 바란다. 나의 출근길 지하철 노선에는 대학교와 국가고시 학원 밀집 지역이 있다. 백팩을 앞으로 메고 휴대폰으로 인터넷 강의를 보거나 두꺼운 교재를 한 손에 힘겹게 들고 시선을 고정한 청년들의 모습을 매일 마주한다. 운 좋게 내 앞자리가 비면 앉을 마음 없어 관심 없는 척 슬쩍 양보하기도 한다. 기대하지도 않은, 평소에 있지도 않았던 행운이라 이 순간 나에겐 없어도 괜찮으니까. ‘와, 나 좀 멋진 어른이잖아.’ 앉아도 되나 눈치를 보는 시선을 피하며 혼자 웃음을 참는다. 아, 출근길이라서 그랬나. 내 몸 조차 버거운 퇴근길엔 ‘아싸 내 자리!’ 할 지도 모르지.
나이 40대, 직장인 20년 차 가까운 이때가 되면 문득 느껴지는 서글픔이나 서러움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단단한 오해였다. 여전히 가끔 퇴근길 지하철 손잡이에 상체의 무게를 가득 싣고 울컥 눈물이 쏟아지려 할 때가 있다.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 얼른 객실 천장에 달려있는 선풍기를 올려본다. ‘아직 감정 어린 청춘이야 뭐야.’ 괜히 스스로를 꾸짖는다. 이십 대 나의 서글픔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때는 눈물을 흘리고도 해소되지 않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다행히 지금은 고개를 들고 삼킨, 혹은 떨어뜨린 눈물 뒤 빠른 회복세로 안정을 찾는다. 수년간 고단함을 단련하며 나의 불안이 달래졌나 보다. 못 버틸 듯 힘들지만 결국 다시 나의 평온함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긍정적인 경험치가 눈물만큼 쌓였다. 회사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유명한 벚꽃 코스가 제방 길을 따라 이어지는데 몇 년째 가보지 못했다. 새 휴대폰도 샀으니 4월엔 혼자 셀카라도 잔뜩 찍으러 점심시간 벚꽃 놀이를 다녀와야지. 코트 따윈 없이 봄 햇살 아래 살랑 살랑 시폰 스커트를 입고 꽃잎처럼 가볍게 걷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야겠다.
March 26,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