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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인 May 25. 2023

딸아, 존버해라

딸아, 존버해라


새벽 3시 이용 가능 유일한 교통수단인 검은색 모범택시, 몸을 빨아들일 듯 탄성 없이 푹신한 가죽시트 특유의 촉감이 여전히 생생하다. 대충 씻고 일단 침대에 누워야 3시간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다. 이불 속에 몸을 구겨 넣으려는데 방문이 살짝 열린다. “얼른 자라.” 엄마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문을 닫으려 한다. 잠이 달아날까 배려한 걸 알면서도 ‘저녁은 챙겨 먹은 거니?’ ‘또 몇 시간 못 자서 어쩌니.’ 질문 하나 없는 것에 괜한 서운함이 올라온다. “엄마, 나 그만 둘까? 정말 힘들어서 못하겠어.” 허락이 필요한 것도 아닌 온전한 내 선택인데 평소 하지 않던 말로 돌아서는 엄마의 뒷모습을 다급히 붙잡는다. “조금만 더 힘내. 지금까지 잘 참아왔잖아.” “엄마는 딸이 매일 같이 이 새벽에 들어오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 여기 다니는 동안 계속 이럴 텐데 참기는 뭘 더 참아!” 그간 꾹꾹 눌러온 설움과 불만이 엄마에게 눈물과 함께 터져버렸다. 사실 엄마 품에 안겨 심장 박동에 맞춘 등 토닥임 몇 번이면 풀렸을지 모른다. “이래서 몸이 어떻게 버티니. 딸, 그만두고 쉬어라. 너라면 원하는 다른 데 못 가겠니.” 늘 내 편인 엄마에게 기대했던 말이다.


25살 초여름, 내 얼굴이 박힌 사원증을 목에 걸고 테헤란로에서의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나만 특별히 빛나고 돋보이는 커리어 우먼을 꿈꾸었겠지. 회사에서 수여한 메달처럼 느껴졌던 사원증은 외롭고 힘겨운 3년을 지내고 나니 흔한 플라스틱 목걸이일 뿐이었다. ‘더는 못하겠다’ 퇴사 의사를 밝혔던 날, 장기 병가와 업무 분담으로 회유하는 부서장의 기름진 웃음을 보며 조금의 아쉬움마저 사라져버렸다. 매일 새벽 집으로 날 실어준 모범 콜택시비를 빠짐없이 확인하여 상신하고 사내 네트워크에서 후회 없이 로그아웃했다. 발이 없어 집에 못 가는 영업전략팀 붙박이 귀신이었던 난, 근무 마지막 날 드르르 드르르 여행 캐리어를 끌고 귀신처럼 떠났다. 의아한 듯 바라보는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을 즐기며 혼자만의 승리감마저 느꼈다. 평소의 컴컴한 새벽 퇴근길이 아닌 해가 긴 여름날 늦은 오후, 괌행 항공기 탑승시간에 맞춘 공항 리무진버스 안에서 외쳤다. 역삼역 3번출구 다신 올 일 없을 거야. 서태평양 섬에서 눈 뜬 다음날, 머리에 하얀 플루메리아 꽃을 달고 투몬 비치를 걸으며 내 몸이 이렇게 가볍다는 것에 놀랐다.


15년이 지나고 보니, 엄마는 대기업 계열사에 취직한, 강남 한복판으로 출퇴근하는 딸의 모습을 뿌듯해하셨던 거다. 이십 대를 꽃피우지 못하는 안타까움보단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인정받는 워킹 우먼의 삶을 살아내기를 바라셨다. 어릴 적 짧은 기억 속 전업주부인 엄마는 살림 외에도 각종 부업으로 늘 손이 바빴다. 평생 사진을 업으로 살아온 아빠가 개인현상소를 차리고부터는 수십 년을 함께 출퇴근하며 관리 업무를 맡으셨다. 결혼 후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줄곧 내조의 삶을 살아온 엄마. 쉼 없이 경제활동을 하였지만 결국 본인이 선택한 직장과 직무는 아니었다. 그날 새벽 내겐 차가운 무관심으로만 느껴진 문틈 사이의 짧은 말은, 새벽까지 딸의 귀가를 체크했을 엄마의 안도의 숨이었다. 어쨌든 이름있는 회사에서 오랜 경력을 쌓았으면 하는 엄마의 기도는 꽉 채운 3년간 유효했다.


<건강보험 자격득실 확인서>를 발급하면 리즈시절과 맞바꾼 그곳이 직장가입자로서의 첫 사업자 명칭으로 적혀있다. 청계천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사옥 이전했다는 말을 듣고 이젠 테헤란로에 발 들여도 되겠네? 여전히 그 사원증을 달고 있다면 과장 직함은 달았을까? 도미노처럼 쏟아지던 업무와 이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정되지 않았을까? 가정법 가득한 질문들이 아직 저 밑에 남아 질척댄다. 그 후 15년 동안 들어본 듯 비슷한 이름의 중소기업 두 곳이 사업자 명칭란을 추가했다. 고맙게도 아이는 아빠의 회사뿐 아니라 제법 긴 엄마의 회사명도 잊지 않고 있다. 구글 검색창에 아빠 이름을 입력하면 사진과 기사가 있는데 왜 엄마는 나오지 않냐며 뼈아픈 질문을 던지지만 말이다. 쓴웃음을 지으며 십 대 딸의 엄마이자 18년 차 직장인 선배로서 농담인 듯 진심을 담아 말한다. “네가 정말 신나는 일, 잘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야. 단, 회사에 들어가야 한다면 꼭 대기업에 입사해야 해.” 용 꼬리보단 뱀의 머리가 낫다고 누가 그래? 꼬리 아니 발톱이어도 용은 용이다. 나 또한 내 엄마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가지 않은 길, 끝을 보지 못한 길을 딸에게 바라는 야속한 엄마. 대신 힘들어하는 새벽, 딸의 어깨를 꽉 끌어안고 힘을 주어 밤새 등을 토닥여줄 거다. 토닥토닥 다져져 마음도 몸도 단단해지길 바라며.


February 2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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