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뒤에 나란히 이어진 설날 덕에 토일월화수 연속 5일을 둥글게 아니, ‘뒹굴 뒹굴’ 푹 쉬며 보낸다. 연휴 마지막 날, 평소엔 진동 알람만으로 눈이 번쩍 떠지는 출근 기상이지만 내일이 살짝 걱정스럽다. 나에겐 아직 하루의 휴일이 있사옵니다! 만 오늘은 그간 누린 뭉그적거림 없이 곧바로 몸을 일으킨다. 우리 집 유일하게 아침을 먹는(먹어야 하는) 아이에게 간단한 식사를 차려주고 흰색 세탁물을 넣은 세탁기를 작동시키고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눈이 내려 포근한 기운의 전 날과 달리 칼바람이 느껴지는 바깥 날씨에 계단 오르기를 선택한다. 25층까지 3세트 반복이다! 2세트를 마치고 나니 이마에 땀이 흐르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12시간 시차가 나는 지구 반대편을 다녀온 것도 아니고, 요 며칠 침대에서 아침 2시간 늦장 부린 대가가 가혹하다 싶다. 일상에서 한참 벗어난 것만 같은 불안감에 구심력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눈물겹다. 목구멍이 타는 듯 피 맛 나는 계단 오르기를 자진하고 있으니 말이다.
20분 만에 끝난 짧은 계단 오르기지만 달리기보다 강도 높은 운동이었음을 깨달으며 좀처럼 안정되지 않는 숨을 몰아 쉰다. 아이 눈에도 평소 달리기 후 돌아온 엄마 모습과 달랐는지 걱정스런 얼굴로 얼음까지 넣은 물컵을 건네준다. 순간, 남편은 내일 일상 복귀 대신 코로나 백신 3차 접종을 예약했다고 한 게 생각난다. 백신 접종 당일과 다음날에도 휴가(당연히 유급)가 주어지니 설 연휴가 끝나고 주말까지 연휴 2차전에 돌입하는 셈이다. 식탁 의자에 엉거주춤 앉아 냉수 한 모금을 마시며 아직 침대에 있는 남편과 내 처지가 극과 극인 듯 느껴져 기분이 가라앉는다. 겨우내 달리기를 못해 떨어진 체력으로 유독 힘든 건데, 남편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당연한 권리를 누리는 것뿐인데 내 안 ‘억울이’가 속 좁은 얼굴을 내민다. 샤워로 끝내지 않고 욕조에 입욕제를 아낌없이 풀어 이순간 나의 권리를 한껏 행사한다. ‘메이드 인 프랑스’ 지중해 씨쏠트와 미네랄이 풍부한 집에서 즐기는 SPA… 음 그런데 많이 덥고 몸이 더 무거워지는 거 같네? 10분을 못 채우고 신비로운 초록 물빛 욕조에서 빠져나온다.
긴장 탓인지 결국 진동 모닝알람이 울리기도 전 눈이 떠진다. 미련 따윈 없다는 듯 이불을 더 힘차게 몸에서 떼어낸다. 아직 어두운 새벽 멀리서 불을 밝히고 다가오는 마을버스 내부가 보이며 내가 첫 승객이라는 걸 확인하면 타기 전부터 특별한 기분이 든다. 아무도 없는 이 버스가 특급열차 <폴라 익스프레스>로 변신하여 환상 탐험을 하는 상상에 빠지진 않는다. 다음 정류장에서 승객을 태우기까지 짧은 동안, 나만을 위한 전세 버스라는 착각을 즐기는 정도다. 특별 대우(?)를 받고 시작한 오늘은 어쩐지 운이 좋을 거 같은 기대감이면 충분하니까. 그마저도 전철역까지 4-5개의 정류장을 거치며 가득 차는 승객들, 밀집도와 비례하여 거칠어지는 마을버스 특유의 자비 없는 운행 덕에 현실감을 빠르게 되찾는다.
‘무리한 일정에도 긴급 대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긴밀히 협조해 주심에 감사드리며…’ 형식적으로 보낸 메일인 걸 안다. 다음에 양해를 바란다는 말로 또 ‘무리한’ 요청을 하겠지. 감정형(F)이었다면 두 번 쓰인 감사 표현에 내 능력치가 몇 퍼센티지 상승한 듯 괜찮은 기분이라도 들겠지만 난 사고형(T)이다. 사무용 의자에 박힌 듯 앉아 책상 주위 원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하루가 오늘도 끝. 으흐흐~ 이 뿌듯함은 뭐지, 변태스럽긴! 퇴근하는 길 위에서 저녁 메뉴를 고른다. 접종한 남편은 뜨끈한 국물이 당길 듯하니 순댓국 정식(편육 포함)을 포장해 가야지. 전철 안에서 2월부터 새로 등록하는 아이 학원에 확정 답변을 보내고 바뀐 아이의 시간표를 채워 완성한다. 점심도시락 때문이라도 식단을 짜는 편인데 당장 필요한 식재료가 생각난다. 밀키트 몇 종과 함께 새벽배송 주문을 완료하고 나니 내려야 할 역이 바로 다음이다. 믿는 이 없지만 은퇴 후엔 일상의 원 운동을 위한 구심력 유지 따윈 없다. 원 밖으로 튀어나가야지. 탱탱볼 같은 예측불가한 그녀, 이 말을 꼭 듣고 말 거다.
February 12,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