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계절에 대한 글 쓰기
큰언니와 기차를 타고 경주역에 내리니 작은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4월 3일쯤이던가? 주말과 식목일을 포함한 사흘간의 연휴를 틈타 세 자매가 만났다. 일찍 봄이 오는 남쪽에서 꽃도 보고 임도 볼 작정이었다. 그때면 벚꽃도 피고 봄꽃이 많이 핀다고 포항에 사는 작은언니가 말해서 남쪽 지방은 그런가 보다,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날씨가 심상찮아 가기 삼사일 전에 물어보니 작은언니가 꽃이 안 피네, 했다. 가기 전날엔, 꽃 피라고 지금 열심히 불 때고 있다, 고 했다.
화력이 부족했던가? 핀 꽃이 없었다. 보이는 나무마다 꽃망울이라도 맺혔는지 눈에 힘을 주고 보았다. 햇볕 잘 받는 곳에 있는 나무에만 겨우 몇 개 꽃망울이 맺혀 있었다. 진도 빠른 나무가 이 정도니 꽃 구경은 틀렸구나 싶었다. 연신 아, 꽃 보고 싶은데, 소리를 하며 점심을 먹었다.
밥 먹은 뒤 양동마을에 갔다. 작은언니 차에서 내리는 순간 거기는 뭔가 좀 다르다고 느꼈다. 고즈넉한 산과 들, 드문드문 보이는 기와집과 초가집 위로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구불구불한 길 위에선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듯했다. 길가에 서 있는 나무를 보니 제법 많은 꽃망울이 맺혀 있다. 조금 핀 꽃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반가워서 탄성을 터뜨렸다.
앞장서서 마을 안으로 들어가던 큰언니가 야, 여기 매화가 폈다, 하고 소리쳤다. 그 뒤로 여기도, 여기 많이 피었다, 여긴 진짜 많이 폈다, 산수유도 피었다, 하며 우리는 서로 핀 꽃 신고를 해댔다. 평소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나무를 한 그루 한 그루 눈에 불을 켜고 들여다보았다. 꽃눈이 맺힌 것도 있고 막 꽃망울을 터뜨린 것도 있었다. 그제야 봄이 오는 것 같아 마음이 설렜다. 햇볕이 계속 정수리를 내리쬐자 큰언니는 목도리를 풀었고 나와 작은언니는 겉옷을 벗었다.
‘매화는 이제 다 피었다’고 나무들을 보며 큰언니가 말했다. 큰언니는 매화를 좋아한다. 매화가 필 때 태어나서일까? 붓글씨로 국전에 입상도 여러 번 한 언니는 호를 ‘매원(梅園)’이라 지었다. 입상 작품 전시회에 갔을 때 언니가 쓴 글씨 맨 뒤에는 ‘매원’이라는 낙관이 단정하게 찍혀 있었다.
꽃 핀 매화가 자꾸 보이자 매화에 흥미가 떨어졌다. 매화가 꽤 많이 피어 있는 나무를 봐도 저기도 폈네, 하고 말았지 가서 보지도 않았다. 마을을 들어설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아무 꽃이라도 좋으니 꽃 한 송이만 보여다오, 하던 마음이 이제 다른 건 좀 없나, 로 바뀌었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목련 나무를 발견했다. 촛대처럼 꼿꼿한 꽃망울을 달고 있는 나무에 조금씩 꽃봉오리를 여는 꽃도 있었다. 아, 저 나무에 몇 송이 피었다, 저기에도, 하며 이번에는 목련꽃 찾기에 들어갔다. 나무마다 피어 있는 목련꽃 수를 세었다. 한두 송이 핀 나무도 있고 예닐곱 송이 핀 나무도 있었다. ‘저기 좀 봐, 저렇게 많이 벌어졌어’, 하고 평균보다 많이 핀 나무를 보고 놀라기도 했다.
양지바른 곳인가 아닌가에 따라 개화의 정도는 확실히 달랐다. 좋은 환경에서 꽃이 더 잘 핀다. 하지만 햇빛을 덜 보는 나무라도 언젠가는, 늦게라도 꽃은 핀다. 시기가 다를 뿐이다.
목련도 곧 다 피겠다, 하며 걷다가 한 모퉁이를 돌았을 때 우리 셋은 동시에 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눈앞에 보이는 집 마당에 자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우리를 위한 선물처럼 꼭꼭 숨어있다가 확, 모습을 드러낸 목련. 송이송이 벙글어진 보랏빛 꽃들이 연등 같았다. 봄이 왔다고 가지마다 불을 밝히고 축하하는 것일까?
책장이 넘어가듯 화사한 자목련 한 그루로 계절은 겨울에서 완전히 봄이 되었다. 기다리던 봄, 보고 싶던 꽃이 거기 있었다. 달라진 계절 속에서 굽이진 고샅길을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그때부터는 나무마다 다가가서 들여다보는 대신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는 꽃을 감상하며 꽃보다 추억 찾기를 더 많이 했다. 임도 보고 꽃도 보니 흡족하였다. 갖춰야 할 예의도 필요 없는 사이, 일과 가사에서 벗어나 아무 거리낌 없이 마을을 돌아다닐 때 우리의 이야기꽃과 웃음꽃도 한껏 피어났다.
유난히 늦었던 절기에 매화와 목련이 우리를 위해 서둘러 꽃을 피운 것 같던 그해 봄과 얼마나 멀어졌을까?
큰언니는 오 년 전 뇌출혈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매화가 피려고 할 때였다. 남쪽에는 피었다고 작은언니가 사진을 보냈었다. 코로나로 봄을 빼앗겼다고 난리였지만 나에게는 큰언니 없는 봄이 더 잔인했다.
수필가로 등단하여 낸 언니의 수필집 맨 앞에는 매화 향기 그윽할 무렵에 태어났다는 말이 나온다. 머리말 끝에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지만 평균 수명 정도만 건강하게 살고 싶다, 그렇게 되어 10년 후쯤 두 번째 수필집을 내게 된다면 책의 수준이 좀 높아지리라 상상하며 부끄러움을 감춘다고 했다. 그러나 언니는 수필집을 낸 지 일 년도 못 되어 가버렸다.
가끔 그 봄을 생각한다. 매화 꽃망울마다 눈을 갖다 대며 꽃봉오리가 벌어질 때를 점치고 갑자기 나타난 자목련 나무에 깜짝 놀라 환호성을 질렀던 그때. 봄기운에 취하여 갈지, 자로 걷고 옛이야기에 허리를 꺾으며 웃어댔던 날.
큰언니가 없어도 봄은 왔다. 큰언니가 좋아하던 매화는 속절없이 피고 또 피었다. 큰언니는 가고 매화만 남았다. 해마다 봄이 가까워져 남녘에서 먼저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는 뉴스를 들으면 큰언니가 생각난다. 큰언니가 떠난 날이 오면 환하게 웃는 큰언니의 얼굴이 매화보다 먼저 피어난다. 큰언니는 하늘에서도 매원을 가꾸고 있을까? 몇 달 후면 또 매화가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