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스로이스

-장면으로 감정 표현하기

by 가을산

롤스로이스로 선택했다. 오빠가 미국에서 사 온 다섯 개가 한 세트인 머그잔은 잔마다 다른 자동차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중 롤스로이스가 가장 근사했다. 컵 안에 길쭉한 일회용 커피와 차, 초콜릿, 너무 달지 않은 사탕들을 차곡차곡 넣었다. 회사에서 바쁘게 일하다가 롤스로이스를 타는 꿈이라도 꾸며 잠시 쉬어가는 순간을 선물하고 싶었다. 내일 그를 만난다.


벌써 네 번째 만남이다. 그는 유쾌한 사람이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밝아진다. 자랑스럽지 않을 가정사도 사실이니까, 하듯 그냥 말하는 사람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낙천적인 사람, 순미의 이상형이다. 그와 잘 해보고 싶다.

다행히, 손잡이가 튀어나온 컵을 담을 만한 작은 상자가 있어서 넣고 별이 그려진 초록색 포장지로 꼼꼼하게 쌌다. 예쁜 리본도 있지만 내용에 비해 과한 것 같아 생략하고 옷장 문을 열었다.

평소 청바지에 셔츠만 입기에 남자와 데이트할 때 입을 만한 옷은 거의 없다. 그런 날을 대비해 몇 벌 장만해 두었어야 했는데. 지난주 교회 갈 때 입었던, 흰 블라우스에 가운데 단추가 주르르 달린 긴 갈색 치마를 입기로 했다. 자신의 옷 중에서는 우아한 편이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 순미 얼굴에 흡족한 웃음이 인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사람은 순미였다. 벽 쪽 자리로 가서 치마가 구겨지지 않도록 잘 펴서 앉았다. 블라우스 깃을 매만지고 선물을 언제 어떻게 주면 좋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나타났다.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그를 보니 가슴이 쿵쾅거린다. 순미도 마주 보고 웃는데 지난번 만남이 떠올라 마음은 조금 어두워진다.


지난번에, 쾌활하여 말이 많던 사람이 돌연 신중한 사람이 된 듯 말이 별로 없었다. 한참 침묵이 흐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빨래해야 돼서 일찍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자취하는 사람이지만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오늘 만남도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늦추어서 두 주 반 만에 만났다.


처음에는 그리도 적극적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달라진 이유가 무엇일까? 그가 고물상 하는 아버지가 바람났다는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해서 자신도 자신의 가정사, 일곱 살 때 부모가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한 것과 관계가 있을까? 그것 말고는 짚이는 게 없다. 별안간 자신이 싫어졌다면 어쩔 수 없지만.


오랜만에 만났지만 어쩌면 그래서인지 이야기가 툭툭 끊어졌다. 순미는 자신의 밝지 않은 성격이 불만이었으므로 천진난만해 보이는 그가 좋았다. 그래서 그가 좀 달라진 걸 느끼면서도 모르는 척했고 작은 선물로 마음을 전하려 했다. 오늘도 잠깐잠깐 해맑은 얼굴로 재미있는 말을 할 때는 즐거웠다. 한편으론 그럴수록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순미는 더 있고 싶었지만 그는 슬슬 일어나려는 것 같아 종이 가방에서 선물을 꺼내 이거, 하고 탁자 위로 내밀었다. 그는 대번에 두 팔을 쭉 앞으로 내밀고 손바닥을 펴 선물을 막는 듯한 몸짓을 하며 ‘아, 이러지 마십시오’ 했다. 폭풍우라도 막듯 그렇게 큰 몸짓으로 거부할 줄 몰랐기에 순미는 당황했다. 자신이 뇌물을 바치는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다.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순미는 ‘별거 아니에요. 사탕이에요.’ 하고 내역을 밝히며 한 번 더 선물에 손을 대고 미는 시늉을 했다. 큰 죄가 아니고 작은 죄니 봐 달라고 사정하듯이. 그랬더니 그는 양손을 내저으며 ‘이러시면 앞으로 못 만납니다’라고 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지 않더라도 그는 앞으로 자신을 안 만날 생각이구나 싶었다. 자신은 잘해 보고 싶어 선물을 준비했는데 그는 이별을 준비했다니. 그래도 가져온 선물을 도로 집어넣어 자신이 들고 나가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다. 제발. 그 순간 순미에게는 그것이 소원이었다.


순미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는 선물을 접수했다. 밖으로 나와 같이 전철역으로 들어갔다. 각자의 집은 서로 반대 방향에 있었다. 동서로 갈려 헤어지며 다시는 안 만날 게 분명한데 내일 또 만날 사람처럼 간단하게 인사했다. 그렇다고 영원히 잘 사세요,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내려가는 계단 앞에 이르자 다리가 풀렸다. 한 계단 한 계단 디디기가 힘겨웠던 게 긴 치맛자락 때문만은 아니었다.


겨우 다 내려가 걷다가 발이 멈춰지는 대로 서 있는데 휘파람 소리 같은 게 나고 ‘헤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바로 앞 철길 건너편에 방금 헤어진 그가 있었다. 한 손에 순미가 준 선물 가방을 든 그는 순미가 자신을 보자 다른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딱, 소리를 내며 웃었다. 방금 헤어진 사이인데 자신이 그리 반가운가? 이게 말이 되는가?

양쪽 플랫폼에 있던 사람들이 그와 자신을 쳐다보았다. 낯이 화끈거렸다. 순미는 뒤로 물러나 벽 쪽으로 붙었다. 그렇지만 조금 전에는 자신의 작은 선물도 완강하게 거부했던 사람이 계속 순미를 보고 웃으며 순미의 주의를 끌려고 했다. 그를 보며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굳어 있는 순미를 두고 사람들은 그가 자신을 좋아해 어쩔 줄 모르는데 자신이 냉담하다고 여길 테다. 순미는 그에게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때 순미가 탈 지하철이 도착한다는 안내음이 크게 울렸다.


그가 순미를 보며 지하철이 오는 방향을 검지로 쿡쿡 찔렀다. 그의 어떤 행동에도 반응하지 않았지만 전철이 들어오기 직전, 그는 웃는 얼굴로 열렬히 손을 흔들었다. 들어온 열차가 그와 순미 사이를 가렸다. 차에 올라타 그가 볼 수 없는 귀퉁이로 가 섰다. 순미에게는 그가 보였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순미를 찾는 듯했다. 천진난만한 사람. 열차는 출발했지만 순미의 마음은 플랫폼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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