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지금 마트에 가려고 하는데, 혹시 필요한 거 있어?"
이든이 묻는다. 오늘 알베르게에서 처음 만난 순례자 친구다. 세르나델로 마을의 알베르게는 마트와 1km 정도 떨어져있다. 하루종일 걷고 온 사람들에게는 특히나 더 애매하고 가기 싫은 거리다. 심지어 밖에는 소나기가 내린다. 에밀리와 쩔뚝거리면서 이미 장을 보고 오다가 소나기에 쫄딱 젖었다. 그런데 마실 물을 깜빡해서 걱정 이든에게는 고맙고 미안한데 나가기는 싫은 상태인 우리 둘. 에밀리와 눈빛을 짧게 눈빛을 교환했다.
"혹시 탄산수 하나와 물 하나 부탁해도 될까?"
역시 에밀리. 이든은 그것쯤이야 하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잠시 후 이든이 돌아와 물을 건넸다. 우리는 이든에게 돌려줄 동전을 찾는다고 24시간 메고 있는 가슴 앞 작은 가방을 뒤적였다. 그러더니 이든이 화들짝 놀라며 말한다.
"No,no,no! this is the camino."
이든이 당황하고 놀라는 걸 보니 진심으로 미안하고 고마웠다. 머리를 띵 맞은 것 같다. 그래, 이게 까미노지. 길 위에서 무언가 줄 수 있는 것도 길 위의 기쁨이다. 하마터면 까미노천사 이든의 기쁨을 방해할 뻔 했다. 기쁘게 주는 사람에게 최고의 선물은 기쁘게 받는 것. 내친김에 나도 주는 기쁨을 느껴보고자 이든에게 가지고 있던 마지막 한국 젤리를 주었다. 코리안 젤리라고 하니 눈이 반짝거리며 바로 까먹는다.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괜찮은 선물을 준 것 같아 뿌듯하다.
저녁에는 재밌는 인연들을 만났다. 나의 첫 알베르게였던 아잠부자에서 함께 묵었던 이탈리아 친구 두 명을 다시 만났고, 중간에 파티마로 가서 헤어졌던 마티아스를 다시 만났다. 내가 코임브라에서 하루 휴식을 취했으니 다시 속도가 비슷해진 것이다. 마티아스 아저씨도 나를 보며 반가운 미소와 함께 놀라워했다. 마트에 다녀와서 선물이라며 작은 캔콜라를 건넸다. 작은 것에도 절약 정신이 투철했던 마티아스가 사준 콜라라 어찌나 소중하던지. 에밀리는 지쳐보이던 다니엘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본인의 마사지볼을 빌려주며 사용법을 알려주고 있다.
서로의 마음을 주고, 주고, 또 주는 밤이다. 만났다가 헤어지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또 다시 만나고. 만남과 헤어짐을 배우고, 기쁘게 주고 또 기쁘게 받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이든의 말처럼 이것이 순례길이고, 더 나아가 삶이 아닐까. 어차피 걸어야 하는 길이라면 만남과 헤어짐 앞에서 조금 더 의연하고, 옷깃을 스치는 인연들에게 조금 더 친절할 수 있기를. 까미노 천사들에게 받은 사랑을 아무런 대가 없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시 나눠줄 수 있기를. Because this is the camino, this is the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