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으로 저렴한 알베르게에서 묵는 날이다. 무려 5유로. 매일 새롭게 만나는 전혀 다른 길만큼, 매일 묵는 알베르게의 형태로 조금씩 달라서 기대가 된다. 5유로짜리 공립 알베르게는 어떠려나, 침대도 딱 9개뿐이고 예약도 안 된다고 한다. 두 가지 걱정이 들었다. 첫번째로 도착했을 때 선착순 아홉 자리가 이미 다 찼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 마을 알베르게는 공립, 사립 통틀어서 한 곳뿐이기 때문이다. 정 안 되면 성당에서 하루만 신세를 져야겠다. 에밀리와 마티아스가 있으니 덜 외롭고 오히려 추억이 되겠지 하면서 말이다. 두번째로는 알베르게의 열악한 정도에 대한 걱정이었다. 싼 데는 이유가 있을 터, 궁금하기도 하면서 걱정도 되었다.
지도를 보고 알베르게에 도착했는데, 알베르게가 아닌 것 같다. 나이가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간호사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커다란 건물 앞에서 왔다 갔다 한다. 알고보니 이번 알베르게는 호스트는 따로 없는 요양병원의 지하 병동(?)이었다. 직원은 현금 5유로씩 받더니 나와 마티아스, 에밀리에게 운이 좋다고 한다. 마지막 3자리만 남은 것이다. 다행히 숙소를 구한 우리는 직원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빛이 가득한 밖과 달리 지하로 향하는 복도는 길고 어두웠다. '와, 여기 혼자 왔으면 진짜 오줌 지렸겠다..' 조개 모양 스티커가 붙은 낡은 방문 하나를 가리키며 안내를 마친 직원은 나갈 때와 들어올 때 직원 호출벨을 눌러야 오갈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타성에 젖은 공무원 향기가 나는 딱딱한 안내를 받으니 더 위축된다. 화장실은 걸어왔던 복도를 ㄱ자로 다시 되돌아가야만 쓸 수 있는 곳이었다. (새벽에 화장실 가고 싶은 일이 없도록 빌어야지..) 침대에 앉거나 누워서 쉬고 있는 순례자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창가 쪽 2층 침대로 올라갔다. 내 밑에는 에밀리가 쓰기로 했다. 남은 1층 침대가 있었지만 무서우면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이 마음 편한지라, 1층은 마티아스에게 양보했다. 짐을 풀면서 침대에 앉거나 누워 쉬고 있는 순례자들을 살폈다. 이번 알베르게에는 수염이 길고 옷이 엄청 헤진 어르신들이 많다. 30일이 아니라 300일쯤 걷고 온 분들처럼 보인다. 약간 무섭기도 하다.
그중 헤그리드 같은 긴 머리에, 덩치가 크고 손에 희한한 팔찌를 주렁주렁 찬 아저씨가 있었다. 프랑스길을 다 걷고 산티아고 대성당에서부터 포르투갈을 걷고 있다는 그 아저씨는 크로아티아 사람이라고 한다. 내가 한국 사람인 걸 알고는 크게 반가워한다. 프랑스길에서 한국인들을 많이 만나고 밤새 술을 마시며 놀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내 침대 쪽으로 와서 휴대폰을 냅다 보여준다. 구글 번역기로 쓴 기분 나쁜 농담이었다.
[나는 결혼할 사람을 찾고 있어. 순례길에서 만난 한국인이 그러던데, 한국 여자들은 남자들을 때린다는 게 진짜야?]
이게 무슨 멍멍이 같은 말인가.
"What? No!"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니 재밌어죽겠다는듯이 껄껄껄 웃는다. 오늘 저녁에 같이 근처에서 밥을 먹으면 어떠겠냐고 하길래 친구 에밀리가 몸이 안 좋아서 따로 먹어야 할 것 같다고 둘러댔다. 에밀리는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 낯선 사람과 소통하는 것이 힘들다며 잘했다고 토닥인다. (나도 영어가 잘 안 되는데..ㅋㅋ) 언어가 달라도 심적으로 편한 사람은 따로 있다는 사실도 이때 알았다. 무튼 죄없는 크로아티아라는 나라에 대한 편견이 생길만큼 기분 나쁜 농담을 뒤로 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세실, 아시아 레스토랑 어때? 너를 위한 저녁 메뉴 아니야?"
"나보다 니가 더 좋아하잖아."
"푸하하!"
동양인이 나보다도 아시아 푸드에 진심인 스웨덴 사람, 독일 사람. 에밀리는 밥 귀신, 마티아스는 라면 귀신이다. 친구들 덕분에 저녁을 먹는 동안에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다시 알베르게. 오늘은 빨래 널 곳도 없어 빨래도 패스다. 자려고 누운 침대는 찝찝하고, 알베르게에는 발냄새와 지하실 특유의 냄새가 진동한다. 에밀리가 작은 공병에 향수를 조금 담아왔다며 코 밑에 발라준다. 자상한 까미노 프렌드. 그러나 새벽 3시부터 누군가의 인기척에 계속 잠을 설쳤다. 짜증이 확 올라오려는 순간 순례길 첫 날이 생각났다. 사람들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오히려 안전하다고 느꼈는데, 사람 마음이 이렇게나 간사하다. 오늘은 귀마개를 깜빡해서 예민한 걸까. 내일은 귀마개를 껴서 아무도 미워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겨우 눈 뜬 피곤한 아침, 출발도 쉽지 않다. 직원이 아직 출근을 안 했는지 벨을 눌러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30분쯤 기다리니 직원이 왔고, 문이 열리자 에밀리가 "세실!"하고 부르며 내 손을 잡아 끌고 나온다. 정말 도망치듯 나왔다.
알베르게에 도착한 순간부터 다시 나올 때까지 불편함과 긴장 속에 있었더니 멀미가 온 것처럼 어지럽다가 걸으니 점점 나아진다. 1시간쯤 걸었을까, 에밀리에게 지난밤 알베르게의 불쾌한 경험에 대해서 먼저 말을 꺼냈다.
"지난 밤 쉽지 않았어. 니가 발라준 향수가 아니었으면 냄새 때문에 잠을 못 잤을거야."
"응 불편했어. 그런데 전쟁 중인 나라에서 온 순례자들은 이런 공간도 매우 편안하게 느낀대. 우린 굳이 불편한 길을 선택해서 겸손함과 감사함을 배우고 있는 것 같아. 편안한 사람들, 편안한 집을 떠나와서."
"아, 겸손해진다..."
걸을수록 겸손해진다. 그렇지.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알베르게가,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알베르게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니까 함부로 좋고 싫음을 판단하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럼 나는 편안하지 않은 이 길을 왜 걷고 있는 걸까?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감사함을 느끼고, 겸손해지기 위해 걷는 걸까. 안다고 착각했던 것들을 알게 되었을 때의 감각은 부끄러우면서도 싫지 않다. 불편함을 관통하면서 몸으로 삶을 배워가는 중이다.
양말을 벗고 빠르에 앉아 발을 만져본다. 양쪽 발 끝에 생긴 물집들이 아물어간다. 살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