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2주 가까이 걷고 있는 지금, 걸음은 느리지만 순례길 지도도 제법 볼 줄 알고 손짓 발짓으로 현지인과 소통하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준베테랑(?) 순례자가 되니 정해진 순례길이 아닌 순례길을 가로질러 빠르게 걷고 싶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특히 오늘의 도착지는 고대하고 고대하던 낭만의 도시, 포르투가 아닌가! 출발할 때부터 포르투에서는 2박 3일 머물 계획을 하고 있을 만큼 포르투갈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알고 있는 도시이자 기대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해서 일찍 쉬고 여유롭게 도시를 둘러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어떤 화를 초래할지도 모르고 말이다.
3시간쯤 걸었을까. 왼쪽 샛길 입구에 순례길 표식인 조개 비석이 나왔다. 순례길을 안내하는 어플이 아닌 구글맵을 열고 손가락 두 개로 길을 줄였다가 확대하며 요리조리 살폈다. 구글 지도가 알려준 길로 가면 10분 정도 빨리 갈 수 있다고 나온다. 속으로 '10분 정도 빨리 가는 것쯤이야 괜찮겠지!'라며 자신 있게 직진해서 좌회전을 해 큰길로 들어섰다. 큰길은 우측에 좁은 인도가 있는 고속도로였는데, 종종 이런 루트도 있었기에 도로 따라서 조금 가다 보면 인도만 있는 길로 연결되겠거니 하며 30분을 넘게 걸었다.
그런데 느낌이 싸하다. 인도는 중간에 끊겼고, 커다란 다리 위에 있는 고속도로 한복판을 계속해서 걷고 있다. 이제 벌써 1시간째다. 앞을 쳐다봐도 인도로 빠지는 길은 안 보인다. 저 멀리까지 고속도로만 계속 연결되어 있다. 이상하다. 구글 지도에는 중간에 샛길처럼 보이는 게 있었는데 말이다. 구글맵으로 보이는 샛길은 지도에는 보이지만, 내 눈앞에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확실히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샛길처럼 보이는 구간은 정식 순례길과 연결된 길이었는데, 다리 위의 고속도로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다리 아래에 있던 샛길인 것이다.
지금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멀리 와버렸다. 내가 멈춘 지점에는 SOS라고 쓰여있는 전화기 부스가 있어서 공포심이 더욱 커졌다. 내 왼쪽으로 커다란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이미 1시간 넘게 걸어왔는데, 뒤돌아서 다시 고속도로를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차에 치여 죽으면 어쩌나 무서웠기 때문이다. 오른쪽에는 작은 숲처럼 생긴 언덕이었다. 지도를 보니 언덕아래가 마을이다. 숲으로 들어가려면 철조망을 넘어가야 한다. 조금 고민하다가 이게 낫겠다 싶어 가방을 철조망 위로 던져놓고, 철조망을 하나씩 밟아 넘어갔다. (현타의 연속)
산 넘어 산이랬나. 철조망 넘어 철조망이다. 넘어가니 더 큰 철조망이 있다. 정돈되지 않은 숲이라 가시넝쿨이 빽빽이 엉켜있어 내려가는 길도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고속도로 위에서 느낀 공포보다는 낫다며 다시 한번 럭키비키 정신으로 무장해 본다. 배낭 속에서 가시로부터 나를 지켜줄(?) 바람막이를 꺼내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마스크를 꼈다. 손도 긁히지 않게 소매 안으로 집어넣고 찍찍이로 야무지게 봉한다. 가드를 올리고 가시밭을 뚫어 겨우 구글지도에서 보았던 그 샛길에 당도했다. 언덕에서 샛길로 내려오는 거리는 짧았지만 철조망과 사람이 다니지 않는 거친 숲길로 2시간 정도를 할애했다.
무사히 순례길 위에 다시 섰으니 망정이지 정말 골로 갈 뻔했다. 포르투에 10분 일찍 가려다가 천국행 급행열차 타고 60년 일찍, 제일 먼 곳까지 갈 뻔했다. 쉽게 가려다가 골로 갈 뻔한 셈이다. 농담이 아니라 이 일로 한 치 앞만 보고 서두르는 일에 대해 조심하게 되었다. 조금 더 멀리 보고 정직한 길로 가는 것이 여러모로 마음 편한 일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어리석은 행동으로 10분은커녕 평소보다 1.5배는 더 많이 걷고 아주 늦게 도착했다. 도착하고 나서도 나 자신에 대한 대견함과 뿌듯함보다는 찝찝함과 후회가 남았다. 경계해야 할 태도에 대해서는 분명히 배웠다고 생각한다. 창피한 일이지만 목숨과 바꾼 귀한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