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순례자의 마음은 아침마다 변덕스럽다. 어떤 날은 아침 일찍 혼자 출발하고 싶고, 어떤 날은 누군가와 같이 가고 싶다. 기준이나 이유는 없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지만 종종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 감정을 나도 설명할 길이 없다. 한편으로는 길 위에서 자기 감정이 움직이는 모양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가 나의 관찰자가 되는 것, 걷기의 효용 중 하나다.
오늘은 조용히 혼자 걷고 싶은 날이었다. 일찍 준비를 다 마치고 나가려는데 에밀리가 보인다. 요 며칠 출발을 함께 했더니 눈치가 보인다. '먼저 가버리면 서운하게 느끼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신발끈을 묶던 에밀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들어 "See you." 하며 씨익 웃어준다. 마음이 녹는다. 마음 편히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생각보다 내가 남을 많이 의식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고, 상대를 존중하면서 내 마음을 지키는 방법도 조금은 익힌 것 같다. 쌀쌀한 6월의 아침, 마음 가벼이 핫팩 대신 따뜻한 인사를 쥐고 출발한다.
걷다 보면 알던 순례자, 새로운 순례자, 동네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섞게 된다. 대화를 하다가 일정 부분은 같이 걷게 된다. 그러다가 타이밍에 의해, 대화 소재에 의해, 혹은 결의 다름으로 인해 혼자 걷고 싶은 순간이 온다. 그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단어로 "See you."만 한 것이 없다. "See you."는 단순한 작별인사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1. 언젠가 한번 더 만날 가능성
2.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위한 정중한 거절
3. 길게 헤어지는 순간에 건네는 아쉬움에 대한 위로
4. 다음을 기약하는 여운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각기 다른 이유와 사연을 가지고 걷는다. 그러다가 길이 엇갈리고 헤어지기도 하지만, 그 짧은 시간 속에서 나눈 대화와 순간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See you."는 그런 인연을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고, 길 위에서 다시 만날지 모른다는 마음을 담아 전하는 인사다. '세상 참 좁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는 것은 실제로 인연은 물처럼 흐르다가 다시 연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설령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 인사 속에는 서로의 여정을 응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길 위에서 아니 삶 위에서 언제나 다음 만남의 희망을 남기며, 새로운 여정에 작은 힘을 실어주는 말.
시작보다 어려운 것이 마무리다. 마무리는 시작보다 배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끝맺음'이 고민일 때는 상대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담아 'See you.'를 외쳐보면 어떨까. 이 문장을 자연물에 비유하면 '물'이 아닐까. 아주 자연스럽게 흐르면서 헤어지고 만나는 물줄기.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헤어지고 만나는 과정,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로써 '부엔 까미노'를 이어 이번에 배운 말을 정리해 본다. 첫 번째로 배운 말은 나와 전혀 다른 상대의 여정에 축복을 주는 'Buen camino.(좋은 길이 되기를.)', 그다음으로 배운 말은 만남과 이별을 연결하는 'See you.(다음에 봐.)'. 나머지 길을 걸으며 또 어떤 말을 언어의 주머니에 담게 될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