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조금 걸었다고 해서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다. 내일은 그만큼 더 많이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정이 빠듯하게 정해진 순례자에게는 특히 그렇다. 그리하여 어제 적게 걸은 까닭에 오늘은 40km를 넘게 걷는다. 가장 많이 걸어야 하는 날에 하필이면 발가락 상태가 이상하다. 작은 물집이 잡힌 것이다. 남일이라고 생각했던 물집 선생이 기어이 내게도 왔구나. 고난 위에 고난. 양말 두 쌍을 포개 등산화 안쪽에 넣고 알베르게 현관 앞 나무 벤치에 걸터 앉아 발을 살핀다. 손가락 두 개를 곧게 펴 비장한 폼으로 발가락 사이 사이에 바세린을 골고루 바른다. 바세린으로 반짝거리는 발 위에 회색빛 발가락 양말을 신고, 경건한 마음으로 울양말을 덧신는다. 순례길 안내를 위한 어플 '부엔까미노'에서 지도를 확인하고 나니 겁이 난다. 대왕 물집 선생님, 내일 와주시면 안 될까요? 제발 오늘만큼은 오지 말아주세요. 아멘.
기도가 완전히 하늘에 닿지 못한 모양이다. 10km가 넘어가니 물집 잡힌 부분이 아파온다. 마침 앞서 가던 마티아스가 뒤를 돌아 잠깐 쉬고 가자는 눈빛을 보낸다. '잘됐다! 더 못 갈 것 같았는데.' 양말 두 겹을 시원하게 벗겨냈다. 양쪽 새 발가락에 대왕 물집이 보인다. 커진 물집이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도록 발가락을 벌려 시원한 바람을 보낸다. 얼음컵에 캔콜라를 콸콸 쏟아 고개를 젖혀 한 입 마시니 좀 살 것 같다. 톡 쏘는 달콤함으로 발의 통증을 잊고 싶은데 쉽지 않다. 제일 오래 걷는 날, 물집이 생기다니. 알베르게까지는 아직 20km 넘게 남았는데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저 걷는 일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매일 매일이 변수다.
20분쯤 쉬었을까. 갈 길이 멀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쁘다. 배낭에서 바세린을 꺼내 다시 발가락과 발바닥에 골고루 발라주고, 양말을 신었다. 어디선가 쉬던 에밀리도 나타나고, 마티아스도 일어났다. 발이 아프니 걷다 멈추기를 반복하게 된다. 이 속도로 알베르게 체크인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친구들과 발 맞추어 걷다가 잠깐 멈춰섰다. "얘들아, 먼저 가. 나 발이 아파서 천천히 가야할 것 같아. 양쪽 새끼 발가락에 큰 물집이 생겼어!" 울상인 내 얼굴을 본 마티아스가 물집 밴드가 있는지 물어본다. 있을 리가 없다. 마티아스가 배낭 속에서 물집 밴드를 주섬주섬 꺼내 건넸다. "물집 밴드는 물집이 나으면 자동으로 떨어져. 붙여 놓고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 고마움과 미안함에 괜히 장난을 친다. "왕물집이 생기다니! 뿌에엥!" 에밀리와 마티아스가 푸하하 웃으면서 물집 밴드를 붙이고 포효하는 내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로 담는다.
천천히 따라갈테니 먼저 가라는 내 말에 친구들은 오케이를 외치고 출발했다. 걷다 멈추고, 걷다 멈췄다. 속도가 나질 않지만 여지껏 그랬던 것처럼 결국 오늘치의 길을 걸어내겠지. 매일 걸어온 길에 나에 대한 믿음이 쌓였다. 거기에 중간 중간 에밀리가 보내주는 메시지는 또 얼마나 든든한지! (전세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메신저 '왓츠앱'에 에밀리와 마티아스의 번호가 등록되어 있는데, 사실 그것만으로도 든든하다. 위급 상황에 연락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어플도 순례길 위에서 외국인 순례자들이 알려준 것이다.)
[세실, 부엔까미노 어플에서 안내하는 길에 공사를 하고 있어. 내가 보내준 이미지에서 초록선을 따라와. 돌아가지 않고 안전하게 올 수 있는 길이야.]
고마운 마음을 안고 걷다가 보이는 약국에서 물집 밴드를 구입했다. 또 생길지도 모르는 물집과 추후에 생길 물집에 미리 대비하고, 나처럼 물집으로 고생하는 누군가에게 나눠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쩔뚝거리며 걷다보니 저녁 7시가 다 되어간다. 다행히 알베르게 문이 열려있다. 알베르게 호스트처럼 보이는 할머니가 나와 나를 반긴다. "너구나! 니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어떤 스웨덴 여자애가 자기 친구가 지금 오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더라구. 너 맞지?" "네, 저에요! 제 친구에요! 기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이토록 따뜻한 사랑과 환대라니. 에밀리는 정말..........감동이다....
브라질에서 온 순례자들의 수박 나눔을 시작으로 서로 가진 음식을 나눠먹다보니 호스트 할머니와도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프랑스인 호스트 할머니는 매년 6월 한 달 동안 포르투갈 알베르게에서 호스트로 자원봉사를 하신다고 한다. 리스본부터 출발하는 포르투갈길에는 순례자가 많지 않아 어떤 날에는 순례자가 아무도 없단다. 그런데 오늘은 순례자들이 많다며 좋아하셨다. 그리하여 반가운 미소를 머금고 어느 순례자가 주고 갔다는 와인을 한 병 꺼내오셨다. 호스트의 와인 덕분에 저녁식사는 작고 근사한 와인 파티가 되었다. 가족식사 같은 저녁을 마무리하고 침대에 앉아 일기를 쓴다. 오늘 하루가 양쪽 발에 큰 물집을 달고 40km가 넘는 길을 쩔뚝거리며 걷는 고난의 날인 줄 알았는데, 고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마티아스의 물집 밴드, 에밀리의 배려, 알베르게 호스트 할머니의 환대, 그리고 한국에서 함께 걸어주는 나의 피앙새.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의 사랑 덕분이겠지? 오늘도 이렇게 하루치의 걷기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