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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 Oct 11. 2024

순례길 단짝과 빗속에서 춤을

코임브라에서 질 높은 휴식을 보내고, 오늘부터는 다시 걷는다. 어제 하루 온전히 잘 쉬어서인지 몸이 가볍다. 창밖으로 힘찬 빗소리가 들린다. 한국에서부터 챙겨온 판초우의를 드디어 입을 생각을 하니 출발 전부터 내리는 비님이 반갑기까지 하다. 똑같은 빗소리인데 어제와 오늘 아침의 마음가짐이 이렇게나 다르다. 몸과 정신이 둘도 없는 단짝임을 알아차리며 금방 회복해준 몸에게 고마운 마음을 보냈다.


에밀리와는 부쩍 가까워졌다. 비슷한 걸음 속도와 비슷한 일정으로 계속 같은 알베르게에 묵고 있기 때문이다. 혼자 걷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지만 혼자 있는 시간 다음으로 에밀리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기 전에 왓츠앱으로 에밀리에게 오늘 저녁을 어떻게 할건지 메시지가 온다. 언젠가부터 혼자 먹는 밥보다 에밀리와 함께 먹는 것이 편안하다. 각자 따로 흩어져 쉴 때도 비슷한 장소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을 보면 희한할만큼 결이 비슷하다. 생김새나 사는 곳은 전혀 다른데도 말이다. 언어가 달라도 친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오늘은 에밀리와 아침을 먹고 같이 출발하기로 했다. 어제 저녁에 미리 사둔 요거트와 과일, 그리고 시리얼. 나눠먹으니 더 맛있다. 불도 들어오지 않는 부엌의 어둠 속에서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밖으로 나왔다. 둘 다 텐션이 좋다. 온전히 밝아지지 않은 코임브라의 비 오는 아침. 날씨가 꽤 쌀쌀하지만 기분은 상쾌하다. 에밀리 기분도 좋아보인다. 다만 조금 추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했다.


“에밀리, 혹시 걷다가 추우면 말해. 내 겉옷 하나 벗어줄게.”

“세실, you konw? 나 겨울왕국 스웨덴 사람이야.”

“푸하하 맞네!”


깔깔거리며 빗속에서 앞뒤로 나란히 춤추듯 걸었다.


빗속에서 춤 출 준비를 완료한 나와 에밀리



“한국말로 ‘Let’s go!’는 어떻게 말해?”

“자, 따라해봐. 가보자고~~!”

“카보차고~~~”

“우리 영상 하나 남길까? 하나, 둘, 셋! 가보자고!!


비는 아침에만 잠깐 오고 11시경부터는 날이 맑아졌다. 비가 그치고 날이 개었으니 작은 빠르에 들러 모닝 라떼를 한 잔 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걸음이 빠른 에밀리는 안 보인지 오래다. 빠르 앞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신고 있던 두꺼운 울양말과 그 안에 신고 있던 발가락 양말을 벗었다. 발가락 사이를 힘껏 벌려 포르투갈의 건강한 볕과 은근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오늘 저녁에는 뭘 먹을까, 에밀리는 잘 걷고 있으려나. 오늘은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이따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해야지’


에밀리라는 친한 친구가 생기니 두려움이 있던 자리에 편안함과 설렘이라는 감정이 들어와 앉았다. 혼자 걸어도 혼자 걷는 기분이 안 들었다. 불과 엊그제까지만 해도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더 가니 마니 하던 나인데, 참 재밌다.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쉬고 있으니 이탈리아에서 온 친치아 아주머니가 ‘올라~’하고 인사하며 빠르에 들어온다. 레몬향이 나는 나뭇잎을 조금 가져왔는데 가방에 어깨끈 쪽에 달면 향긋하게 걸을 수 있단다. 그 나무잎을 받아 배낭 앞쪽 어깨 끈에 달고 한참을 혼자 걸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길래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제멋대로 개사해서 큰 소리로 부르며 걸었다. 그야말로 순례길 무코인 노래방.




신이 난 이유는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걸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출발한 날부터 코임브라까지 매일 30~40km를 걸었는데 오늘은 25km 정도 걷는다. 7km 더 걸으면 마을이 하나 나오지만 알베르게는 없고, 70유로 이상의 숙박 시설뿐이었다. 70유로는 순례자에게 아주 큰 돈이기에 오히려 좋다는 마음으로 짧게 걸었다.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출발했는데 오늘은 오후 1시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시간도 남고, 체력도 남게 어색하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순례자 여권 크레덴시알에 쎄요(순례자 도장)를 찍고, 호스트의 안내를 받았다. 도착하니 에밀리, 나, 친치아뿐이었다. 하루에 25km를 걷는다는 것은 새로운 하루를 더 선물 받은 것 같다. 씻고, 손빨래를 한 뒤에 알베르게 뒷마당에 빨래까지 널었는데도 아직 오후 2시잖아!


피곤해서 침대에 누워 쉬는 에밀리와 친치아를 뒤로 하고 홀로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체력이 남는 귀한 날, 침대에 누워있을 수 없었다!) 검색해보니 이 동네가 새끼돼지구이 요리로 유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천안 병천 순대가 현지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음식인 것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지역 사람들에게는 꽤 유명한 모양이었다. 하루를 더 부여받고 평소보다 에너지가 남은 기념으로(?) 혼자 외식을 하기로 했다. 메뉴판을 보니 가난한 순례자에게는 비싼 편이라 사장님께 양해를 구했다. 유명한 음식이라 조금만 맛보고 싶은데 이 가격의 반만 드리고 요리 양도 반 정도만 맛볼 수 있겠냐고. 성격 좋아보이는 사장 아주머니는 흔쾌히 수락했고 혼자 로컬 식당에서 칼질을 하는 사치를 부려보았다.


오후 6시쯤 되었을까, 에밀리가 부른다.


"세실, 이제 슬슬 요리를 해볼까? 나는 밥은 내가 앉힐게. 아까 사온 뻥튀기는 아껴뒀다가 내일 간식으로 같이 나눠먹자."


나보다 쌀을 좋아하는 스웨덴 친구 덕분에 거의 매일 밥을 해먹고 있다. 밀가루를 잘 소화하지 못하는 것까지 닮은 까미노 프렌드. 그런데 아뿔싸, 이 알베르게에는 가열 도구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은 바게트랑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에밀리가 전자레인지로 밥을 해보겠단다. 열악한 주방에서도 에밀리 쉐프 덕분에 야무지게 저녁밥을 먹었다. 누군가 놓고 간 비어있는 스파게티 소스통을 닦아 얅고 긴 포르투갈 쌀을 물과 함께 넣어 렌지에 돌려놓고, 바지런히 다른 재료들을 손질했다. 설익은 전자레인지 밥, 그리고 익힌 브로콜리와 토마토, 올리브, 소시지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에밀리가 묻는다.


“오늘 제일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야?”


하루 중 제일 행복했던 순간이라. 걷기에 급급해서 놓치기 쉬운 질문이었다. 짧게 생각하고 자신있게 말했다. 바로 생각나는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 어둠 속에서 아침을 먹고, 빗속을 걸었을 때! 나 그때가 너무 행복했어. 물론 하루 일과 다 끝내고 밥 먹고 있는 지금도 너무 행복해.”


에밀리는 내 대답을 듣더니 본인도 마찬가지라는 말을 했다. 궂은 날인데도 그 빗속을 걸은 것이 오랫동안 생각날 것 같다고 했다. 이 날 이후로는 순례길을 걷는 모든 날이 내내 맑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날, 그 시간이 어느 맑은 날보다도 좋았던 날로 기억하지 않을까 싶다. 친구의 존재로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소소한 순간 안에 담긴 위대한 행복들이 보인다. 행복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조차 근사한 사치라는 것을 깨닫는다. 오늘 하루치의 주어진 길을 스스로 걷고 나서 각자의 행복을 나누는 저녁 식사 시간.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것은 이런 걸까. 남은 길 위에서도 매일 이런 사치의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오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Life isn't about waiting for the storm to pass, it's about learning to dance in the rain.

- Vivian Greene


인생은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비비안 그린 (영국의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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