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실 Sep 07. 2024

순례자도 쉬는 날이 있어요?

새벽 5시 20분. 알베르게 1층 침대에 누워있으면 보이는 창문에 새벽빛이 들어온다. 투두둑 투두둑. 창문 위에서 탭댄스 추는 굵은 빗방울들도 보인다. 비가 오네. 순례길을 걸으며 처음 만나는 비다. 쉴 때 됐다고 비님이 주룩주룩 내리는가보다. 몸은 여전히 고단한 상태다. 6시 4분. 쉬어야겠다. 누워서 몸 상태를 느끼며 조금 고민하다가 오늘 하루 쉬어가기로 결정했다. 비가 오니 라면이 땡긴다. 문 연 아시아마트가 있으면 라면이라도 사서 끓여먹으면 좋겠다.


계획에 없던 비 오는 날의 휴식. 쉰다고 생각하니 괜히 운치있고 설렌다. 한국에서 버리려다가 순례길에서 한번만 더 입고 버리려고 챙겨온 자줏빛 쉬폰 원피스를 꺼냈다. 이걸 진짜 입기는 하는구나. 등산화 대신 검정 쪼리 슬리퍼를 신었다. 신데렐라 구두를 신은 것마냥 거울을 보며 손은 원피스를 살짝 쥔 채 뒤꿈치를 한번 들어본다. 이것이 바로 순례자의 릴렉싱룩. 구글맵을 열어 카페를 검색한다. 시간이 좀 이르긴 하지만 지금 출발해서 15분쯤 걸으면 카페에 도착할 수 있다. 하루에 9시간 걷던 순례자에게 15분은 귀엽지 그래. 수첩과 펜을 베이지색 에코백에 넣고 오른쪽 어깨에 걸었다. 제법 멋쟁이 같다.

나가려고 보니 비가 멈췄다. 아침에는 비가 와서 오히려 좋았는데, 이제는 비가 멈춰서 오히려 좋다. 그리고 카페에 도착해서 카페 콘 레체와 작은 빵 하나를 시키니 하늘과 바다가 뒤바뀐 것처럼 다시 비가 쏟아진다. 오히려 좋다. 내렸다 멈췄다 하는 비가 과부화된 내 몸에 열기를 식혀주는 것 같은 기분이다. 눈과 눈 사이가 멀어지면서 이완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것도 얻지 않아도 된다는 본분(?)을 알아차리고 있다. 따뜻한 라떼를 한 입 홀짝 마시고, 에코백 속에 있는 수첩과 펜을 꺼냈다. 도쿄의 츠타야서점에서 산 작은 수첩과 펜은 쓸 때마다 기분이 좋다. 모닝 커피를 마시러 나온 무라카미 하루키가 된 것처럼 어제 쓴 일기 다음 페이지를 딱 펼치고 쓰고 싶은 말부터 써본다.


지금 마시고 있는 커피가 맛있고, 순례자 신분으로 휴일을 만끽하는 이 사치가 귀하고 행복하다. 이른 아침인데도 단골 손님들이 꽤 많이 앉아있고 카페 사장님과 다정하게 대화하는 장면도 기분 좋다. 커피와 곁들일 빵을 사장님께 하나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빵을 하나 추천해준 사장님은 이 빵을 왜 추천하는지 번역기와 몸짓을 활용해가며 설명해주었다. 3유로 남짓한 이 작은 빵의 장점을 알려주고 싶어하는 카페 사장님 덕분에 어제까지만 해도 미워했던 코임브라를 사랑하게 되었다. 수첩 한 장을 찢어 한국말로 짧은 감사인사를 적었다. 그리고 구글번역기를 돌려 영어로도 함께 적었다. 카페에서 나갈 때 나도 이 분께 좋은 기분을 선물해드리고 싶다.


자, 그리고 그 다음은 오늘 할 일을 적어보자. 걷기로 바쁘다고 미뤄왔던 것들을 오늘은 해봐야지. 1번은 했고 다음은 2번이다.


1. 멋쟁이 옷 입고 모닝 커피

2. 목적지 없는 느린 산책

3. ATM기에서 유로 뽑기

4. 스패츠 수술




코임브라 대학교 식물원. 지난 밤, 같은 방에서 묵었던 세계여행 중인 스위스 대학생 친구들이 추천해준 곳으로 왔다. 코임브라만 3일을 머물렀던 이 친구들에게 가장 좋았던 곳 딱 한 군데만 추천해달라고 하니 소개해준 곳이다. 18세기 후반 베네딕트 수도회에서 기증한 땅에 조성된 이 곳은 무려 250년이 되었다고 한다. 고풍스러운 아치형의 문과 평온하게 물을 뿜으며 시간의 무게에 내려 앉은 분수대. 걸을 때마다 과거의 새로운 장면이 나타났다. 코임브라에 현존하는 천국을 그렇게 느리게 걷다가 다시 분수대 앞으로 돌아와 앉았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는 태교하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나에게 온전한 쉼을 허락한 내 자신이 고맙고 기특했다.


느린 산책 이후에는 하기 싫지만 이제는 해야 하는 일을 하러 나섰다. 그것은 바로 ATM기에서 유로를 인출하는 일. 순례길도 처음이지만 유럽도 처음인 겁보 30대 여행자는 걷는 것보다 돈 뽑는 게 제일 괴롭다. 인출 과정이 복잡해서 돈을 못 뽑으면 어떡하지, 카드를 넣었는데 카드만 먹고 돈은 안 나오면 어떡하지, 성공적으로 인출했지만 전봇대 뒤에서 어리버리한 동양인 여자애를 주시하던 유럽 도둑에게 돈을 뺏기면 어쩌지. 그렇다고 이제 더 미룰 수는 없다. 몇몇 공립 알베르게의 경우는 현금만 받고 있는데 현금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적당한 ATM기를 찾으러 사냥하는 눈으로 길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 대형 마트 안에 있는 ATM기 앞으로 갔다. 마트 안이라 가드도 있고 사람도 많으니 도둑이 내 돈을 가져갈 때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로 선택된 ATM기다.


미리 찾아본 유로 인출 블로그 글을 다시한번 정독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기계 앞에 섰다. 30km 걸을 때보다 땀이 더 난다. 돈이 나오자마자 게눈 감추듯 검은 동전 지갑으로 쏙. 마트 구석에 서서 지갑 안에 든 유로들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세어본다. 갯수가 맞다. 휴. 로또에 당첨된 평범한 회사원이 로또금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듯이 힙색 속 지갑을 철통보안하며 이제 숙소로 들어간다. 이것만으로도 큰 일을 하나를 해낸 것 같다. 숙소로 돌아와서 침대 앞 빈백에 몸을 던져 누웠다. 누워서 다리를 흔들흔들하다가 수첩에 써놓은 마지막 할 일이 생각난다. 아, 스패츠 수술!


신발 안에 모래와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다리에 끼우라며 쿡 아저씨가 준 스패츠였다. 몇 번 사용해보니 단점이 하나 있었다. 발목부터 덮지 않고 다리에서부터 끼워야하는 긴 스패츠다보니 다리에 땀이 많이 찼다. 땀띠가 생길 것 같아서 길이를 좀 줄여야겠다고 생각하며 미루던 과업이었다. 가방에서 실과 바늘, 그리고 검은 스패츠를 꺼냈다. 창가 쪽 의자에 자리를 잡고 스패츠를 반 접어 꼬맸다. 중학교 때 배웠던 가물거리는 박음질을 띄엄띄엄. 스패츠 사이 사이로 바늘이 통과하는 모습이 숨을 쉬는 모양 같다. 엉성한 바느질 안에서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었다.

스패츠 수술 성공!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에밀리의 메시지다. [세실, 오늘 저녁 같이 먹을래? 내가 괜찮아보이는 식당 하나를 알아뒀어.]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 이탈리아에서 온 친치아 아주머니와 줄리아라는 친구를 만났다. 각자만의 휴일을 보낸 순례자들과 다같이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에밀리가 찾아둔 로컬 식당으로 가는 길에 파티원이 2명에서 4명으로 늘었다. 저녁을 먹으며 오늘의 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포르투갈길의 특별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또 왜 이 길을 걷게 되었는지 대화하며 아주 깊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중 50대 후반의 친치아 아주머니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자기 자신과 주기적으로 대화하는 것만큼 건강한 행위가 없다는 말. 친치아 아주머니에게는 홀로 이 길을 걷는 것이 스스로를 사랑해주는 일이라고 했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 누군가와 친밀함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면 끊임없이 대화하고 사랑하라고도 덧붙였다.


"세실, 토크 토크. 아모레 아모레. 베리 임폴턴트."



중요한 것은 사랑.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좋은 도구는 대화. 이 길을 사랑하며 걷기 위해서 필요했던 휴식이었다. 비생산적인 대화를 나누고, 비생산적인 하루를 보내면서 생산적인 시간만이 유익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고작 하루 쉬었을 뿐인데 몸이 가뿐해졌다. 내일은 아침부터 비 소식이 있다고 한다. 드디어 판초우의를 입어볼 수 있겠다. 더 많이, 빨리 걸어야겠다는 욕심은 완전히 내려놓았다. 빗 속에서 춤추는 마음으로, 천천히 걸으면서 온 감각을 열어 아름다운 것들을 내 안으로 들이자. 아름다운 코임브라가 알려준 휴일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전 13화 어려운 결정은 베개에 맡기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