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실 Sep 06. 2024

어려운 결정은 베개에 맡기고

동생에게 문자가 왔다.


[언니, 엄마한테 순례길 간 거 말 안 했어?]

[아, 맞다!]


28살부터였던가. 30년 가까이 '착한 딸 말기'였던 나는 K장녀 생활을 청산했다. 그 이후로 무언가 하고 싶은 게 생겼을 때마다 누구에게도 컨펌받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에게 떳떳한 결정을 하되 그 책임도 기꺼이 내가 짊어질 것을 다짐했다. 산티아고 순례길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떠난 길이었다. 자식을 향한 사랑 어린 걱정은 때때로 자식을 한없이 작고 무력하게 만든다. 엄마의 걱정을 이해하지만 대체로 그 걱정은 모두에게 이롭지 않았다. 그래도 동생 문자를 받고 이제는 말씀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보니 한국은 저녁 8시쯤이었고 휴대전화를 꺼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저 산티아고 순례길이에요."

"어디?"

"포르투갈에서 스페인 산티아고로 걸어가고 있어요."

"세상에! 세실! 너무 부럽다!"


엥?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다. 걱정이 아니라 부러움이라니. 장대비처럼 쏟아질 걱정을 대비해 장우산 같은 마음을 준비해 두었는데 부럽다니! 이 얼마나 힙한 응원인가! 엄마는 여자 혼자 그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한 대견함, 그리고 그 결정을 지지해 준 예비 남편 동욱에 대한 고마움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낯선 땅을 한 달 가까이 혼자 걷는 딸을 걱정하기보다 부러워하는 엄마를 가졌다니. 걸을 수 있는 건강한 신체와 내 결정을 지지해 주는 가족이 있음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10년 아니 5년 뒤쯤에는 엄마와도 함께 갈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미래에 함께 걸을 모녀 순례길을 위해 건강 관리를 잘하시라는 말과 함께 웃으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청개구리 순례자를 신나게 하는 엄마의 말들. 건강을 최우선으로 안전하게 걷기로 한 스스로의 약속이 다시금 떠오른다. 이거야말로 엄마에게 줄 수 있는 효도이자 스스로 약속을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순례길 7일 차다.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30km 넘게 걷고 있다. 발과 다리가 이상하다. 충혈된 눈도 여전하다. 눈가를 만지니 뜨끈뜨끈하다. 어떻게 걸어야 더 바른 자세로, 덜 피곤하게 걸을 수 있을까? 땅에 닿는 발의 감각을 느끼면서 몸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 5일은 더 매일 30km씩 걸어야 그 이후는 조금 여유가 있을 것이고, 계획한 대로 완주할 수 있을텐데. (꽤나 계획적인 사람처럼 생각하는군) 머리는 팽팽 돌면서 원하는 미래를 외쳐대는데 발은 무거워지고 눈꺼풀도 덩달아 무거워진다. 앞에 보이는 벤치에 일단 누워본다. 15분 뒤로 알람을 맞추고 눈을 감았다.



길거리에서 낮잠 자는 장면은 나도 예상치 못한 장면이다. 어이없고 웃기지만 좀 자고 나니 살 것 같다. 눈에 피로를 덜어내고 걸으니 이번에는 왼쪽 검지 발톱이 곧 빠질 것 같다. 검지 발톱이 빠지는 느낌은 뭐랄까, 작은 불꽃이 서서히 사라지는 기분이다. 오늘의 목적지인 코임브라에서 다음날 하루 쉬고 갈지 진심으로 고민되었다. '꼭 두 발로 산티아고까지 다 걸어야 할까?', '하루 이틀 버스나 기차를 타고 점프하는 건 좀 별로인가?' 한국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정해져 있다 보니 쉬지 않고 걸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다. 이제 알베르게까지 5km 남았다. 전체 거리와 상관없이 가장 힘들 때가 알베르게 도착하기 5km 남은 시점이다.




절뚝거리며 코임브라에 도착했다. 마을 초입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숙소는 한참 남았다. 오늘의 알베르게는 원망스럽게도 높은 지대 위에 있다. 코임브라는 마을 자체가 경사진 언덕 위에 있다. 한국의 부동산적 관점으로는 입지가 별로인데 사람은 참 많다. 유아차에 아이를 태운 엄마들이 다니기에는 편하지는 않겠다. 대형마트에 한번 가려고 해도 산을 타는 기분이 들 것 같다. 배달 오토바이도 편히 다니기는 어렵겠네. 계속 궁시렁거리는 걸 보면 힘들기는 했나 보다. 죄 없는 마을 지형을 향해 실눈 뜨며 비판하고 있는 걸 보니 말이다.


에밀리의 제안으로 오늘 저녁은 같이 장을 봐서 해 먹기로 했다. 일명 순례자 디너 코스. 순례자가 많은 프랑스길에는 레스토랑에서 순례자를 위한 코스 요리를 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메뉴는 정해놓지 않고 각자 가지고 있는 것, 사고 싶은 것을 섞어 먹기로 했다. 삼겹살이 먹고 싶었던 나는 커다란 냉동 삼겹살 두 줄과 후식으로 먹을 복숭아를 샀다. 삼겹살 두 줄을 보고 에밀리가 투 머 치 아니냐며 놀랐는데, 다 먹을 거니 걱정 말라고 달랬다. (실제로 다 먹었다. 두 줄 안 샀으면 싸울 뻔했다 얘..) 에밀리는 마늘, 브로콜리 그리고 치즈를 샀다. 이것 말고도 우리에게는 약간의 올리브 오일과 에밀리가 걸으면서 나무에서 딴 레몬 하나가 있었다.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에밀리와 나

알베르게 부엌에서 프라이팬에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우리가 가진 재료들을 썰어 넣었다. 하얀 접시에 익은 음식들을 덜고, 치즈를 찢어 올리니 제법 그럴싸하다.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어로 원활하게 소통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천천히 서로의 속도를 기다려주며 대화했다. 곧 있을 나의 결혼과 동욱을 만나게 된 이야기 그리고 에밀리의 이상형에 대해서 여고생들처럼 떠들었다. 그리고 에밀리에게 내 작은 고민을 털어놓았다.


사실 지금 발 상태가 안 좋아서 걱정이라고 말했다. 내일 다음 마을까지 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다음, 그 다음 다음 날도 계속 걸어야 할 텐데 몸이 따라와 주지 않아서 속상하다고 말했다. "세실, 매일매일 쉬지 않고 걸어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어?" 아니었다. 그건 주어진 시간에 두 발로 완주하고 싶다는 내 욕심이었다. 처음에 내가 스스로에게 약속한 '자기 친절'이 빠져있는 길을 걷고 있었다.


"에밀리, 내 계획은 이틀 뒤에 포르토에 도착하면 거기서 하루 더 쉬는 거였어. 코임브라에서의 휴식은 계획에 없었거든. 이곳에서 하루 더 쉬는 게 맞는 건지 고민이 돼."

"세실, 스웨덴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 어려운 결정은 베개에게 맡겨봐."


한숨 푹 자고 아침에 생각하라는 뜻이었다. 밤새 베개에 귀 기울인 내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드는 생각에 따르기로 했다. 에밀리는 본래 코임브라에서 하루 더 쉬어갈 계획이었기에 나는 혹시 모를 이별을 대비해서 선물을 건넸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사진 엽서들을 펼쳐서 원하는 사진을 고르게 했다. 지리산 둘레길에서 먹었던 삼겹살이 들어가 있는 사진을 들었다. "오늘 먹은 너와의 식사가 생각날 것 같아. 난 이걸로 할래. 세실 너무 고마워."


하얀 속눈썹을 가진 지혜로운 친구 에밀리. 덕분에 고민은 내려놓고 베개에 풍덩 잠겨 귀를 기울였다. 포근하다.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어떤 마음이 들어도 모두 존중해 줄 생각이다. 이 길을 걷는 목적은 내 마음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으니까. 발끝에서 시작된 성찰이 비로소 쉬는 밤이다.

작가의 이전글 돈 안 되는 숲 속 무인 카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