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실 Sep 04. 2024

길 위의 가족들

순례길 신부 입장 ep.11

나는 길 위의 가족들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동행을 했다. 그들은 나에게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면서각자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귀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기 자신의 마음에 귀 기울이는 것이 우선순위라고 여기는 우리였다. 이 부분이 맞았기에 함께 그리고 따로 걸을 수 있었다. 쿡, 마티아스, 에밀리, 라슬로에 대한 이야기다. 까미노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네 명의 친구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한국에서 왔다. 실명은 정종국. 50대 중년 남자고, 순례길은 이번이 3번째다. 몇 년 전 프랑스길 800km를 걷고 이번에는 40여일에 걸쳐 북쪽길을 완주한 뒤 바로 이어서 포르투갈 길을 걷는 중이었다. 순례길 생활을 알뜰살뜰하게 하고, 순례길 꿀팁을 많이 알려주는 쿡은 우리 사이에서 까미노킹으로 불렸다. 순례길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이다.


대단한 체력과 겸손함, 그리고 냉소적인 유머를 가진 분이다. 틱틱거리는 말투 안에는 커다란 정이 들어있다. 맥락을 읽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기꺼이 내어주며 무심하게 말을 덧붙이는 분이다. "저도 받은 거예요." 참, 쿡은 중간에 마티아스와 파티마에 함께 가게 되어서 헤어졌는데, 그날 저녁 같은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났다. 무교 신자에게 파티마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성요한의 축제를 성대하게 즐기는 것이 낯섦을 넘어 무서움이었다고 한다. 세 번의 순례길 중 처음으로 택시를 타고 바로 알베르게로 점프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무튼 쿡과는 그렇게 또 함께 하게 되었다.




마티아스

나와 마티아스

독일에서 온 비건남. 40대 중년 남자고, 4번째 순례길을 걷고 있다. 3번째 순례길도 포르투갈길이었는데 그때 혼자 포르투갈길을 걸었던 기억이 너무 좋아서 다시 또 혼자 포르투갈길을 찾았다고 한다. 말수가 많지는 않지만 한번씩 치는 말장난은 모두를 빵 터뜨린다. 조용히 웃긴 스타일이다. 자연을 좋아하는 마티아스는 걸음이 느리다. 긴 호흡으로 혼자 걷는 기쁨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것이 이 길을 걷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본 순례자 중에서 자기 자신에게 가장 친절하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아차리는 분이다. 약간의 거리를 두면서 부담스럽지 않게 상대를 도울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아 그리고 한국 라면을 좋아한다. 매일 저녁 그는 독일에서부터 챙겨온 너구리 라면, 신라면을 먹었다. 한국 음식을 원래 좋아해서 맨 처음 내가 그에게 건넨 믹스커피가 굉장히 반가웠다고 한다.



라슬로

라슬로는 헝가리에서 온 60대 중년 남자. 쿡과 까미노 절친이 되어 매일 비슷한 속도로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고 마지막 날까지 쿡과 함께 했다. (둘은 걸음이 정말 빠르다.) 걷는 동안 그의 낙은 쿡을 놀리는 것. 쿡과 라슬로가 티격태격하며 서로를 놀리는 모습은 내 웃음 버튼이었다. 순수한 개구쟁이들 같았다. 라슬로는 비건이다. 풍이 심하게 와서 몇 년 전부터 아예 극닥적인 비건식을 하고 있다고 한다. 스키, 농구 등 각종 스포츠를 즐기던 그였는데 아프고 난 뒤부터는 걷기 밖에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어딘가에 종속되지 않고 남은 생을 자유롭게 살기 위해 걷는다고 했다. 멋진 분이다.


라슬로 아저씨는 삶에 대해 긍정적인 호기심을 갖고 주체적으로 살고 싶어하는 나를 많이 예뻐해주셨다. "세실 너 걸을 때 정말 행복해보여! 완전 까미노 프리마돈나처럼 걷는다니까? 난 세실이 걸으면서 불평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라슬로가 내게 가장 많이 한 말이다. 덕분에 내가 가진 긍정이 이 길 위에서도 강점으로 통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에밀리

포르투갈길의 처음은 리스본, 중간은 포르토, 끝은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이다. 리스본부터 포르토는 사람이 거의 없다. 쿡과 마티아스를 만난 것만으로도 감사해하고 있을 때 또래 친구 에밀리를 만났다. 스웨덴에서 온 92년생 여자이다.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천천히 친해지다가 아주 깊게 친해졌다. 첫 순례길이 포르투갈길이라는 점, 포르투갈길 초반부를 걷는 유일한 30대 여자라는 점, 둘 다 <연금술사>를 재밌게 읽었다는 점, 둘 다 술을 잘 못한다는 것. 무엇보다 결이 맞았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데도 이렇게 편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나중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에밀리와 나는 서로 알게 모르게 많이 의지하며 길 위에서 함께 성장했다. 에밀리는 브라질 사람과 결혼한 친언니의 영향으로 포르투갈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브라질어와 포르투갈어가 같다는 것을 이때 알았다.) 업을 바꾸는 과정에서 생긴 시간을 활용해 궁금했던 순례길도 걷고, 포르투갈어를 실전에서 연습하기 위해 산티아고 포르투갈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모국어인 스웨덴어 외에 영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그녀는 세계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걸으면서 그 지역의 역사에 대해서, 유럽 국가들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신선한 재료로 음식을 해먹는 것도 에밀리에게 배웠다. 그녀와 함께 차려먹는 저녁 시간이 즐거워서 생전 하지 않던 요리에도 재미가 생겼다. 순례길이 처음인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야무진 그녀에게 나는 '까미노 헤르미온느'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에밀리, 쿡, 세실, 라슬로 / 걷다가 나온 카페에서

걸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이 네 명의 가족이 길 위에서 나에게 준 친절은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듯싶다. 헤어질 때마다 아쉬웠지만 우리는 서로의 길을 진심으로 축복해주었다.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우리 모두가 기쁜 방향이었다. 자기 앞에 주어진 길들을 누구보다 멋지게 갈 거라는 것을 믿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