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실 Sep 02. 2024

어쩌면 신은 나를 사랑할지도 몰라

순례길 신부 입장 ep.10

토마르에서 빠져나가는 길. 아쉬울만큼 아름답다. 이른 새벽 특유의 빛과 냄새와 고요도 좋다. 매번 일찍 나올 수밖에 없는 아침 풍경이다. 그나저나 혼자 걷는 구간이 올 때마다 무서워서 발발 떨던 사람은 어디갔지? 쿡과 마티아스가 없는 길인데도 말이다. 나의 이런 상태에 참 감사한 마음이 든다. 누구를 향한 감사함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감사한 마음으로 언덕을 하나 넘으며 한참 혼자 걷고 있으니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머리에 손수건을 헤어밴드 삼아 질끈 묶은 체격 좋은 백인 남자가 묵주를 들고 올라오고 있다.


"봄 까미뇨!"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좋은 길을 걷기를 바라는 축복의 마음을 담은 순례길 위의 인사말이다. 스페인어로는 '부엔 까미노". '부엔'은 '좋은'이라는 뜻이고, '까미노'는 '길'이라는 뜻이다. 내가 걷는 길은 포르투갈이었기 때문에 부엔 까미노가 아니라 포르투갈어 '봄 까미뇨'라고 말한다. (쿡에게 배웠다.)


"How is it going?"

"perfect!"


영어가 달리니 간단한 인사만 해주기를 속으로 바라며 배려심 깊은 척 먼저 가라는 눈짓을 했다. 그 친구는 내 옆에 나란히 서더니 같이 걷는다. 신호가 잘못 전달됐나보다. 아주 빠른 속도의 영어로 말하길래, 실은 내가 영어를 잘 못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천천히 말해주면 소통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고맙게도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며 다시한번 천천히 말을 붙였다. 이 친구의 이름은 루스. 혼자 기도하며 걷는 것이 좋다고 한다. 20대까지 많이 방황하며 지내다가 신을 알고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고 한다. 술과 여자에 빠져 자기 자신을 신이 사랑으로 구해주었다며 내게도 신을 믿냐고 묻는다.


신이라. 나는 어머니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기에 선택권 없이 모태 신앙을 갖게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종교의 자유라는 것을 사회시간에 배워와서는 절과 교회도 모두 다 가보았다. 지금은 성당에는 잘 가지 않지만 한번씩 가면 울컥하는 날라리 천주교 신자이자 템플스테이를 즐기는 천주교 신자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다. 다시 루스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누가 내게 신을 믿냐고 묻는다면 내 깊은 곳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하지만 신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거만해보이는 관점일지 몰라도 나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라는 인식이 사는데 더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말이다.

휴대폰 뒤 성모마리아 사진을 보여주는 루스



유년기, 10대, 20대. 바람 잘 날 없는 날들이었다.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을 건너가며 신을 참 많이 원망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K장녀 역할을 수행하며 원망할 수 있는 구실을 더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근 몇 년 간 신에 대한 원망하지 않았다. 감사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감사의 대상이 대놓고 신은 아니었지만 삶에 대해 대체로 감사했고, 살아있음에 감사했기에 결국 나는 신께 감사하며 사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딴 생각 속에 있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루스는 아이처럼 신나는 목소리로 신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한다. 사랑 받는 사람의 눈에서 행복이 흐른다. 루스와의 짧은 대화 이후, 신에 대해 생각하며 걸었다.



루스를 먼저 보내고 혼자 걷다보니 갈림길 2개와 표지판 하나가 나왔다. 한 쪽은 짧고 가파른대신, 한 쪽은 길고 완만하다고 쓰여 있다. 어느 길로 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러닝을 하던 포르투갈 현지인 아저씨가 긴 루트를 추천해주신다. 짧은 길로 갔을 때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고. 그렇지만 선택은 언제나 너의 몫이라고 하셨다. 나는 긴 길을 선택했다. 아저씨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선택은 내가 했으니 선택에게 대해 책임질 요량이었다. 이 길은 순례자만 없는 게 아니라 사람이 없었다.



숲길 한 쪽에 누군가 키우고 있는 듯한 데이지 꽃밭이 있었고, 길은 끊임 없이 이어졌다. 그늘 한 줌 없는 길 위에서 더울 때는 사과를 베어물었다. 더울수록 맛있는 사과다. 그리고나서 한참을 더 가니 작고 아름다운 성당과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오늘도 알베르게에 꼴찌로 도착할 것 같지만 걷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는 코스다. 성당 앞에 있는 작은 카페에 들어가 카페 콘레체(카페라떼)를 시키고 밖에 있는 테이블로 나왔다. 등산화에서 발을 빼고, 신고 있던 발가락 양말을 벗고 발가락 사이 사이에 바람과 볕이 통할 수 있게 해주었다.

카페 꼰 레체


오롯히 혼자가 되는 기쁨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걷기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얻게 된 것들이겠지. 어쩌면 내가 그렇게 원망하고 의심했던 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 곳에 왔을리가 없으니 말이다. 사랑 받고 있다는 기분. 평소보다 카페에서 오래 머물면서 볕멍을 때렸다. 맞은 편 성당 안에 있을 십자가를 향해 고마워하면서. 남은 길도 안전하고 기쁘게 걸을 수 있도록 지켜달라는 얄팍한 바람도 함께.


포르투갈 시골 마을에서 만난 능소화와 작은 성당


작가의 이전글 두려움 뒤에 서있는, 아직 보지 못한 용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