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실 Aug 22. 2024

순례길 1일차, 아 괜히 왔다

순례길 신부 입장 ep.2

"지금이라도 비행기를 프랑스행으로 바꾸면 어때?" 공항 가기 이틀 전, 이미 순례길을 다녀온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지인이 다녀온 프랑스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은 애정 어린 마음이 담긴 전화 통화였다. 포르투갈길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아 걱정도 있었을테다. 그래도 내 마음은 홀로 걷는 길에 집중할 수 있는 포르투갈길 위에 있었다.


핀란드를 경유해 긴 시간을 날아 포르투갈 리스본 공항 도착했다. 공항 와이파이가 잡히면서 휴대폰 시계가 오후 3시 30분으로 바뀐다. 한국인은 고사하고 동양인도 안 보이는 공항에 배낭을 메고 서있자니 외면하고 싶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준비가 없이 덜렁 온 것도 공포심을 부추기는 데 한 몫했다. 생존에 꼭 필요한 짐만 5kg 정도 챙겨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에서 출발하는 날 아침까지도 일을 하느라 순례길 준비를 거의 하지 못했다. 공항 가는 날 오전에 퇴사하는 회사와 아름다운 이별에 마침표를 찍기 위한 강의를 했기 때문이다. (이 강의는 나를 성장시켜 준 회사와의 좋은 마무리이자 감사를 표현하는 일이었고, 동시에 새로운 도전이라 당일 새벽까지 강의 자료를 붙잡고 있었다.) 강의를 준비하며 이러다 순례길은 준비 하나도 못하겠다고 너털웃음 지으며 했던 말은 현실이 되었다. 최소한의 짐만 챙기는 것이 노멀티 인간의 최선이었다.


두려워도 어쩔 수 없다. 이제 무서워도 걸어야 한다. 이미 와버렸기에 빼도 박도 못하는 순례자다. 출발하기 전에 예상했던 두려움 아닌가. 포르투갈길 출발점인 리스본부터 시작하는 순례자들이 많지 않아 있던 알베르게도 문을 닫고 있다는 어느 블로거의 말을 듣고 생각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노숙이었다.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우니 침낭을 들고 공동묘지에서 자거나 근처 성당에서 하루만 신세를 지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금 유일하게 알고 있는 정보는 2가지. 첫 번째 정보는 리스본 성당에서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시알을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정보는 오늘 하루를 묵을 공립 알베르게 주소다. 첫날 하루만 잘 해결하면 다음날은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경유한 핀란드의 헬싱키 공항에서 메모해 둔 것이다. 이것이 바로 P인간의 계획이다.

공항에서 빠져나와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리스본 성당에서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았다. 다시 1시간 넘게 전철을 타고 또다시 걸어서 아잠부자 마을의 유일한 공립 알베르게로 향했다. 아잠부자로 향하는 전철은 공항과 분위기가 달랐다. 매우 지친 것 같은 흑인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눈빛에서 두려움이 탄로 날까 봐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알베르게인지 뭔지 숙소에서 가서 그냥 눕고 싶었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탄 순간부터 24시간 이상 쉬지 못하고 계속 이동 중이라 체력적으로 매우 지쳤다. 아잠부자 역에 내려서 구글지도 어플을 켰다. 알베르게 운영 시간이 훌쩍 지난 저녁 8시였다. 역 주변은 휑했고 여인숙 비스무리한 것도 없었다. 알베르게 문이 잠겨있으면 문을 두드려서 부엌 바닥에서라도 잘 수 있게 부탁해 볼 참이었다. 그래도 계속 신을 찾게 되더라. 기댈 곳이 없었다.


'아, 살았다! 신이시여, 고맙습니다.' 그때 순례자를 위한 숙소임을 알려주는 조개 모양의 표식이 보였다. 이렇게 반가울 데가! 겨우 찾은 알베르게를 보자마자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열린 문으로 들어가니 호스트는 퇴근하고 없는 듯했다. 알베르게 안에는 잘 준비를 하는 몇몇 순례자들이 보였다. 침대보 없이 비어있는 2층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호스트가 없어서 허락 맡지 못하고 도둑잠을 자게 되었다. 이미 체력적으로 지친 상태이지만 내일부터 30km 넘게 걸어야 한다. 그냥 조개 표식을 따라가면 되는 건가, 순례자를 위한 어플이 있다고는 하는데 어떻게 쓰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든다. 출발도 하기 전인데 말이다.



좌 알베르게 침대 / 우 알베르게 공용 부엌

작은 남녀공용 화장실 옆에 달린 샤워실에서 대충 씻고 나왔다. 침대가 있는 방은 불이 꺼져있었고 오늘 하루 어디선가 걸어왔을 고단한 순례자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젖은 머리를 스포츠 타월로 둘둘 감아놓고 작은 불을 켤 수 있는 부엌으로 나왔다. 손바닥만 한 작은 일기장을 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지금 느끼는 것들을 그대로 쭉 적어보았다.



6월 11일 화요일 밤 9시

고단한 하루다. 순례자는 없고, 언어는 안 통하고, 몸은 피곤하고.  (중략) 다행히 아잠부자의 공립 알베르게에서 한국인 아저씨 한 분을 만났다. 힘들었지만 쓰다 보니 감사한 것들이 올라온다.


1. 우선 순례길을 흔쾌히 보내준 오빠에게 감사하다.

2. 리스본 공항에서 리스본 성당까지 갈 때, 전철표를 무사히 사게 되어 다행이었다.

3. 전철 방향이 맞는지 확인해준 남자분과 임신한 여자분께 감사하다.

4. 리스본 성당 문이 닫히기 전에 크레덴시알을 발급받을 수 있어 감사하다.

5. 대중교통을 타고 무사히 아잠부자에 오게 되어 감사하다. 길을 헤맸지만 무사히 알베르게를 찾았다.

6. 저녁 7시가 훌쩍 넘은 8시쯤 도착했는데, 남은 침대가 있어서 감사하다.

7. 아잠부자 유일한 공립 알베르게에서 한국인 아저씨를 만났다. 직원이 없는데 알베르게 숙소 비밀번호도 알려주시고, 마트 위치도 알려주시고, 무엇보다 순례자 지도앱 보는 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했다. 포르투갈길을 첫 순례로 온 것에 대해 많이 놀란 것 같았다. 그리고 공항에서 바로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 찐으로 놀라심. (중략)


프랑스길로 갔으면 외롭지 않고 무섭지 않고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하루였다. 걷기도 전인데 말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것조차 남들의 말을 듣고 판단하고 있구나 싶다. 나의 까미노를 걸어보자.


첫 일기, 하루도 빠짐없이 썼던 순례길 일기
작가의 이전글 결혼 두 달 전, 혼자 산티아고 순례길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