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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 Aug 23. 2024

의지하기 싫은데 의지하고 싶어

순례길 신부 입장 ep.3

출처 Unsplash

산티아고 순례길 0일차.


알베르게가 조용하다. 다들 잘 준비 중이다. 비어있던 창가 쪽 침대 2층으로 침낭과 경량 패딩을 먼저 올렸다. 몸의 일부처럼 바짝 메고 있던 배낭은 등산화와 함께 창가 쪽 바닥 구석에 두었다. 차가운 철제 침대 사다리를 한 발 한 발 최대한 조용히 밟으려고 노력하면서 천천히 침대 위로 올라갔다. 조용한 노력과 달리 철제 사다리는 밟을 때마다 끼익 끼익 소리 내며 존재감을 내뿜었다. 눈치 보느라 진땀 빼며 겨우 올라가 침대 위에 앉았다. 끼-익. 작은 움직임도 기가 막히게 알아채는 침대다. 하, 사람 민망하게시리.


‘모든 알베르게가 철제 침대인 건가? 그럼 걷는 동안 숙면은 글렀네, 아니지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하면 소리고 뭐고 푹 잘 수 있으려나. 바로 곯아떨어질 만큼 걸을 수 있겠지? 오늘은 최대한 정자세로 곧게 누워서 최대한 움직이지 말고 자야지.’ 철저히 혼자가 되고나서부터 속으로 하는 말이 늘었다.


침낭을 꺼내 매트에 펼치면서 손과 눈을 바삐 움직이며 알베르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슬쩍 살폈다. 오늘 이 알베르게의 순례자는 나를 포함해서 6명인 것 같다. 순례길 고수의 냄새가 난다. 내 오른쪽 1층 침대에는 얼굴 새까맣게 그을린 중년의 남자가 반쯤 누워 안경을 코 밑에 올려두고 휴대폰을 보고 있었고, 왼쪽 1층 침대에는 체구가 왜소한 할머니가 묵주를 만지작거리며 순례길 지도책을 보고 있었다. 맞은편 문 쪽에는 벌써 주무시는 분도 계셨다. 또다른 두 자리는 짐만 있고 사람은 없다. 부엌에 앉아있을 때, 한 잔 하러 나가는 것처럼 보이던 순례자들의 자리가 아닐까 싶다.


내가 순례자들을 보듯이 이 공간에 있는 사람들도 나를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어리바리해 보이는 내가 다들 걱정된다는 눈으로 힐끔힐끔 쳐다봤다. 샤워하러 갔다가 두고 온 게 생각나 계속 왔다 갔다 거리니 눈길이 갈 수 밖에. 어설프기 짝이 없는 순례자다. 그렇다고 나에게 말 거는 사람은 없었다. 그 또한 배려처럼 느껴졌다. 도움을 청하기 전까지 지켜보는 것도 배려 아니겠는가. 샤워를 하고 공용 부엌에서 일기를 쓰고 있는데 오른쪽 침대에 누워있던 아저씨 순례자가 나왔다.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동남아 쪽 분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한국 사람 같다. 순진한 표정을 장착하고 용기 내어 먼저 말을 걸었다.



“혹시 한국분이세요?”

“네, 왜요?”

“저는 이번이 첫 순례길이고, 오늘이 순례길 첫날인데요. 너무 아무것도 몰라서요. 내일 출발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알고 계세요?”

“까미노 어플 없어요?”

“어… 깔았는데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어요.”

“첫 순례길인데 리스본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네.”

“첫 순례길을 여기로 왔어요? 여긴 사람도 거의 없고 별론데. 지도 어플은 익혀두는 게 좋아요. 처음에는 지도에 의지하는 게 크거든. 자기 전에 많이 만져봐요. 3일만 걸어보면 순례길 어지간한 건 다 익혀요.”

“아하… 혹시 내일 몇 시쯤 출발하세요?”

“한 5시 30분쯤?”



역시, 한국 사람이 맞다! 지금 생각해도 참 운이 좋다. 이 구간에는 한국인은커녕 동양인 순례자 찾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이 분의 이름은 쿡(kook). 진짜 이름은 ‘정종국’이라고 하셨다. 외국인 친구들이 부르기 쉽게 쿡으로 본인을 소개한다고 했다. 몇 년 전 산티아고 프랑스길을 완주하고, 올해는 산티아고 북쪽길을 다 걸은 뒤 바로 이어서 포르투갈길을 걷기 위해 오셨다고 했다. 나는 리스본에서 아잠부자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했지만 쿡 선생님은 리스본부터 아잠부자까지 3일에 걸쳐 걸으셨다. 프랑스길과 북쪽길과 달리 포르투갈길의 초반부는 그냥 도로와 공장뿐이라 별로라고 했다. 길이 지루한 건 괜찮은데 순례자들을 만나기 쉽지 않아 그게 참 어렵다고 하셨다. 시니컬하게 말씀하시면서도 같은 한국인인 나의 존재가 싫은 것 같지 않았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말문을 트고 난 뒤 쿡 선생님께 지도 어플 보는 법과 저녁에 장을 볼 때 아침거리까지 함께 사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아침거리는 어떤 게 좋은지를 배웠다. 선생님만 괜찮으시다면 내일 아침에 출발만이라도 함께 하고 싶었다. 몇 시쯤 출발하는지만 여쭤보고 5시에 알람을 맞췄다. 2가지 이유로 차마 함께 걷고 싶다고 솔직하게 이야기 하진 못했다. 첫 번째는 그분의 소중한 걷기에 방해가 될까 봐였고, 두 번째는 스스로 풀지 못한 경계 때문이었다. 같은 한국 사람이어도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라 걱정이 되었다.



요란한 침대 소리와 함께 침낭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불편한 잠자리인데 이상하게 편안하다. 침대의 형태만 겨우 보이는 어둠 속에서 명상하듯 눈을 느리게 껌뻑이며 24시간을 회고했다. 회사에서 오전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 씻자마자 배낭을 챙겨 인천 공항으로 가던 길. 경유지에서 비행기를 놓칠까봐 조마조마하던 일. 리스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펼쳐진 생경한 풍경. 리스본 성당에 들러 다시 전철을 타고 아잠부자로 넘어와 알베르게를 찾아 헤맨 일. 오늘만큼은 공동묘지나 성당에서 노숙하고 싶지 않다며 안 찾던 신께 기도하던 일. 걷기도 전인데 진이 빠진다.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알베르게에 도착해 한국 분까지 만나 도움을 얻다니 감사가 절로 올라온다.


좀 더 시간이 지나니 여기저기 코 고는 소리가 들리면서 코골이 오케스트라 공연이 펼쳐진다.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례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때는 정말 두려웠는데 말이다. 원한다면 손짓 발짓으로라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기니 든든했다.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안도감을 느끼는 밤이다. 귀마개가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았다. 새벽에 사람들 나가는 소리를 듣지 못할까봐 거의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오늘은 어찌어찌 잘 넘어갔지만 과연 내일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까?’ 쿡 아저씨가 나를 데리고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무엇이 되었든 스스로 걷고 싶다는 마음이 섞였다. 의지하기 싫은데 너무나 의지하고 싶은, 의지할 수밖에 없는 마음.



어차피 잠도 안 오고, 아니 자기는 글렀고 까미노 지도 어플이나 보자. 내일은 32km쯤 걸어야 하고 알베르게가 있는 마을은 산타렘…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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