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신부 입장 ep.4
오늘은 본격적으로 걷는 첫날이다. 누군가 뒤척이는 소리에 눈이 떠진다. 사실상 잠을 거의 못 잤다. 새벽 4시 55분. 더 자고싶다는 생각은 안 든다. 어지간히 긴장하기는 했나보다. 아직 울리지 않은 휴대폰 알람을 끄고 몸을 일으켰다. 움직일 때마다 철제 침대가 삐그덕거린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으음’ 소리. 내 소음이 누군가의 잠을 방해한 것 같다. 의도치 않게 요란을 부리며 2층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침대 밑에 두었던 얇은 슬리퍼를 배낭 옆에 쑤셔놓고 맨 발에 등산화를 신은 뒤 침낭과 말려둔 양말 같은 짐을 배낭 안에 대충 우겨넣고 뒤꿈치를 들며 공용 부엌으로 나왔다. 어제 알베르게 호스트가 없어서 못 낸 숙소 비용은 도둑잠을 자고 난 아침에 쪽지와 함께 올려두었다.
순례자를 위한 인프라가 거의 없는 곳이라 오늘의 목적지는 선택지가 좁다. *알베르게가 있는 산타렘이라는 마을까지 무조건 32km 이상 걸어야 한다. 공항에서 출발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긴장이 풀어지기는커녕 더 조여온다. 쿡 선생님말처럼 3일 정도 걸으면 좀 익숙해지겠지. 대충 세수를 하고, 비장하게 로션과 선크림을 발랐다. 걷는 복장으로 입고 자서 옷은 그대로다. 아무렇게나 넣어둔 배낭 속 짐들을 전부 빼서 메기 좋게 패킹한다. 패킹하고 있으니 쿡 선생님이 나오고, 그 다음에 어제 좀 일찍 주무시는 것처럼 보인 독일인 순례자가 나온다.
누구든 순례자 한 분이 출발할 때 약간의 차이를 두고 뒤따라갈 요량으로 일찍 준비했다. 같이 걷지 않더라도 방해하지 않고 안정감 있게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누구와 출발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생활 좀 해본 30대의 짬바를 발휘해서 한국의 믹스커피를 하나씩 드렸다. 쿡 선생님은 괜찮다고 나중에 먹고 싶을 때 먹으라며 만류했지만 길 위의 순례자 친구들을 주려고 많이 챙겨왔다고 하니 못 이기는 척 받으셨다. 독일에서 온 아저씨는 너무나 좋아하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닝커피로 타드셨다. 아메리카노 먹듯이 끓인 뜨거운 물을 컵에 가득 붓길래, 그의 첫 믹스커피를 위해 안 되는 발영어와 몸동작을 총 동원했다. “워터 베리 리틀. 베리베리 리틀”
어제 미리 사놓은 바나나와 빵, 그리고 남은 콜라를 아침으로 때웠다. 여전히 신기한 알베르게 안을 구경하며 아침을 먹고 있으니 쿡 선생님도 식사를 하러 오셨다. 포르투갈길 초반부는 카페도 거의 없고 물 하나 사먹을 슈퍼도 없으니 간식을 중간 중간 잘 생각하며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걸으면서 먹는 간식은 수분기가 있는 과일이 좋다는 말도 해주시면서 가지고 계시던 사과를 하나 주셨다. 걸으면서 먹으면 손에 과즙이 묻어 끈적일텐데, 바로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무심하게 챙겨주시는 것 같아 감사했다. 본인도 순례길을 걸으며 순례자들에게 배운 지혜라고 했다. 고수의 향기가 뿜어나오는 분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니 내적 친밀감이 생긴다.
“선생님, 혹시 괜찮으시면 출발할 때만 함께 갈 수 있을까요?”
“그래요. 어차피 걷다가 속도가 달라서 찢어질거라.”
쿡 선생님은 프랑스길, 북쪽길을 걷고 포르투갈길까지 걷고 있다. 심지어 포르투갈길은 북쪽길을 40일 넘게 걷고 바로 넘어와 걷고 있는 베테랑 순례자였다. 한국인인지 알기 어려운 새까만 얼굴과 하얗고 덥수룩한 수염에서 포스가 느껴졌다. 순례길 시작만 안전하게 할 수 있다면 그다음은 어떻게든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밤 잠이 안 오는 바람에 순례길을 볼 수 있는 지도 어플도 열심히 익혔으니 말이다. (그렇게 익힐 게 많지 않은 어플이지만 불안감에 이것 저것 만지고 또 만지며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코리안 믹스커피를 좋아하던 독일 아저씨는 가장 먼저 출발했고, 나와 쿡선생님이 이어서 출발했다. 첫날부터 30km 넘게 걸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상당했지만 쿡과 함께 걸으니 덜 무서웠다. 덕분에 두려움보다 길에 대한 설렘이 커져서 괜히 왔다는 어제의 후회는 쏙 들어갔다.
한참 걷다보니 걸음이 빠른 쿡 선생님은 보이지 않았고, 슬슬 배가 고팠다. 더위와 다리 통증보다 배고파서 걷지를 못하겠더라. 손이 끈적해서 불편할 것보다 갈증과 배고픔을 달래줄 음식만 생각났다. 그때 쿡 선생님이 준 사과가 생각났다. 가방 안에서 미지근하게 익은 사과를 티셔츠에 슥슥 닦아 한 입 베어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입 안에서 천국이 달콤하고 시원하게 열리는 기분이 아닌가! 사과가 이렇게 맛있는 과일이었던가. 환상적인 사과의 달콤함에 대해 떠들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 걷다가 쿡 선생님을 만나면 감사 인사와 함께 주신 사과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수분이 있는 과일이 걷기에 얼마나 탁월한지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맛있게 걷는 법은 이때부터 하나씩 터득하게 되었다.
끝이 안 보이는 포도밭을 10km 정도 더 걸었을 때쯤에는 카페가 하나 보였다. 귀한 카페다. 갈증이 차오르던 차였다. 이번에는 콜라가 먹고 싶었다. 평소에도 술을 즐기지 않는 나는 얼음을 가득 채운 코카콜라를 주문하고 카페 야외 테라스 자리에 자리를 잡으러 나갔다. 반가운 얼굴들이 있었다. 오늘 아침에 제일 먼저 움직였던 멤버들이다. 독일 아저씨와 쿡 아저씨! 이번에는 독일 아저씨와도 서로 이름을 알려주며 대화를 나누었다. 독일에서 온 이 순례자의 이름은 마티어스. 포르투갈길이 혼자 걷기 좋아 또 걸으러 왔다는 이 분도 순례길만 4번째라고 한다. 띄엄띄엄 하는 영어로 다른 나라 친구와 소통하는 순간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소통이 어려운 부분은 쿡 아저씨가 통역해주시며 도와주셨다.
“와, 콜라가 미쳤어요! 살면서 먹은 콜라 중 제일 맛있는 것 같아요.”
“그냥 그렇게 느껴지는 게 아니고 이유가 있어. 순례길에서 파는 콜라는 다르게 만들어서 그래.”
“진짜요?”
“뻥이지! 허참 그걸 믿네. 껄껄껄.”
입 안에서 터진 사과 폭죽, 포도밭 10km를 걷고 마시는 콜라, 길 위에서 만난 까미노 친구들, 그리고 농담 섞인 대화. 이야기가 깃든 길 덕분에 첫 날 순례길을 즐겁게 걸었다. 걷는 동안 이탈리아에서 온 친치아라는 아주머니와도 알게 되었다. 낯선 길 위에서 나와 비슷한 순례자를 만나는 것은 생각보다 큰 기쁨이다. 잠깐의 대화가 긴 시간을 홀로 걷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긴 시간 홀로 걸었기에 누군가와의 짧은 만남이 반가운 것인지 그 선후 관계가 어떻든 간에 오감이 열리는 행복을 느낀다. 다른 순례자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까? 그렇게 길 위에서 만난 우리는 산타렘 마을에 도착해 같은 알베르게로 향했다. 이미 도착해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각자 장 봐온 것들을 나눠먹으며 저녁 시간을 보내고 나니 조금은 긴장이 풀린다. 어쩌면 나 이 길을 정말 다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알베르게 : 산티아고 순례자를 위한 전용 숙소. 신원이 확실한 순례자 여권 소지자만 묵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