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실 Aug 25. 2024

길 위의 예비 신부에게, 한국의 피앙새로부터

순례길 신부 입장 ep.5

결혼에 대한 로망은 없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다. 각자가 짊어진 등 뒤의 무게와 고단함을 함께 하면서 나와 평생을 같이 갈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꽤 합리적 낭만이 섞인 버킷리스트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혼자 순례길을 걸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오히려 혼자 걸으며 상대방이 얼마나 괜찮고 근사한지 확인하게 되었다. 친한 친구이자 애인이자 곧 남편이 될 동욱에 대한 이야기다. 순례길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걷는 모든 시간 안에서 그의 사랑을 느끼고 또 배운다.


1. 한국에서 공항에 가기 전날, 필요한 짐을 패킹하니 5kg 정도의 무게가 나왔다. 그런데 짐을 더 챙기자는 동욱. "세실 짐은 다 쌌으니까 다른 사람을 위한 짐도 조금 싸보면 어때요? 순례길에서 도움을 준 분들께 드릴 수 있는 아주 작은 걸로.“ 동욱의 아이디어로 휴대폰 앨범에 담긴 우리가 행복했던 순간을 30개쯤 골랐다. 동욱은 그 사진들을 조합해 엽서로 만들어주었다. 덕분에 길에서 내게 도움을 준 까미노 친구들에게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있었다.


2. 2024년 6월 12일. 혼자 걷지만 함께 걷는 중이다. 순례길을 32km 걸은 첫 날, 동욱은 연차를 내고 제주에 갔다. 한라산을 등반하며 41.85km를 걸었다. 8시간의 시차로 포르투갈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한 동욱이 먼저 걷고나서 내가 걷게 되었다. 한라산 위에서 촬영한 응원 영상과 사진을 보며 걷기 시작했다. 덕분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참, 이 날은 동욱이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한 날이기도 하다. 같은 신발을 신고 각자 다른 곳을 걸으며 각자의 버킷리스트를 실행한 소중한 1주년이었다.


3. 2024년 6월 13일. 동욱은 제주에서 육지로 돌아와 다시 나를 응원했다. 송파둘레길을 37.08km 걸었다고 한다. (4시간 넘게 걸었다고 한다) 이틀치의 걷기를 선물하는 남자와 결혼을 하다니 난 복도 많지! 낮의 세실과 밤의 동욱이 통화를 하며 걸었던 날들은 오랫동안 여운이 남을 듯싶다. 어떻게 함께 걸어줄 생각을 했냐고 하니 자기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응원이 걷기란다. 태산 같은 걱정은 삼키고 유별난 나를 있는 그대로 지켜주는 이 분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이런 태도로 격려해준 것은 아니다. 혼자 순례길을 다녀오고 싶다고 말했을 때, 솔직히 조금 밉다며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솔직하게 말해주는 그가 고마웠다. 싫은데 억지로 보내주는 리액션은 나도 원치 않았고, 싫어하는 동욱을 거부하면서까지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매일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을 붙잡고 '그럼에도' 나의 편에 서기로 마음 먹은 뒤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얻고 오지 않아도 괜찮아. 뭘 깨닫지 않아도 괜찮아. 가다가 중간에 무섭고 힘들면 버티지말고 그냥 와도 돼."


그 기억을 떠올리니 다시 눈물이 차오른다. 온전히 내가 되어 말하는 사려 깊은 배려심 아닌가. 푹신한 모래 위에서 신나게 그네를 타는 아이가 된 것 같다. 넘어져도 괜찮다. 안전한 모래 언덕이 발 아래 있으니. 이렇게 나는 혼자 그리고 함께 걸으면서 그와 정신적 그리고 물리적으로 가까워졌다.



이전 04화 쫄보 순례자가 재밌게 걷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