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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 Oct 27. 2024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보이는 것들

D-day 산티아고 대성당

산티아고 순례길 초반에는 매일 무리하게 걸어서 눈이 충혈되고 물집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이제는 20km 정도 걸으면 딱 좋은 것 같다. 배낭도 어떻게 해야 내 몸에 맞게 조절하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발 상태에 따라서 신발끈도 어떻게 조이면 되는지, 신발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몸 상태를 관찰하고 언제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몸이 적응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안 와닿다가 순례길 10일차가 넘어가면서부터 몸이 적응한다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조급해할 필요도 없고, 내 몸에 친절한 상태에서 '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걷는다는 것을 이제 좀 알 것 같은데, 몇 시간 뒤면 길의 끝이다.


헤르본 수도원에서 만난 친구들이 마지막 길을 함께 걷고 싶어했다. 그런데 내 마음은 달랐다. 끝에 가까워지니 그간 지나온 길에 대해 생각하며 걷고 싶었다. 추억을 공유한 사람들과 함께 걷거나 홀로 걸으면서. 추억을 공유한 사람들은 흩어졌으니 홀로 걷는 선택지뿐이다. 헤르본에서 만난 친구들이 아쉬워했지만 조금 걷다가 나는 잠시 쉰다며 걷는 거리를 조절했다. 쿡과 라슬로는 나보다 먼저 산티아고에 도착했고, 에밀리는 엊그제 부터 매일 10km씩만 걸으면서 여유와 쉼을 즐기며 걷고 있다고 한다. 마티아스는 원래 그랬듯 본인의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걷고 있다. 각자 다른 속도로 걷고 있지만 함께 걷고 있다.





쿡 아저씨는 산티아고 대성당 도착 1km 전 지점에 마중 나와있었다. 순례길의 진짜 도착점, 성당으로 들어가는 길을 축하해주기 위해서다. 성당에 들어가는 길목에 한 순례자가 나를 와락 안으며 눈물을 흘린다. "성당 마당 앞에서 너를 찾고 있었어! 무사히 완주한 거 정말 축하해 세실!" 길 위에서 두어번 정도 잠깐 같이 걸었던 로렌 아줌마였다. 산티아고 대성당의 웅장함보다 쿡과 로렌을 만났을 때의 감동이 훨씬 더 컸다. 산티아고는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내 일처럼 축복해줄 수 있는 곳이다. 그 장면을 다시 생각하니 눈가가 뜨거워진다.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도 새로운 친구를 만났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11년 간 계신 조지환 베드로 신부님이다. 휴가를 얻어 본당의 청년들과 함께 포르투갈길을 걸으셨다고 한다. 걸으면서 마주친 까미노 천사들을 보며 받은 친절과 사랑을 돌려주고 싶으셨던 신부님은 본인을 필요로 하는 순례자들에게 고해를 해주신다고 했다. 그렇게 성당 앞에서 만난 까미노 친구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고해성사를 했다. 시간이 늦어 고해실을 빌리지 못해 성당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마음을 씻었다.


새로 만난 까미노 친구 베드로 신부님을 쿡과 라슬로에게 소개해주고 싶어서 다같이 함께 저녁을 먹었다. 각자의 여정을 나누고, 서로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따뜻한 시간이었다. 라슬로 아저씨가 신부님에게 나를 설명하던 말이 기억난다. "내 기억에 세실은 매일 웃었고, 스스로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야. 그녀에게는 좋은 에너지가 있어." 


그리고 어느덧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마지막 만찬을 마치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애써 씩씩한 척 말했다. "See you. 저는 이 말이 좋아요. 다시 만나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잖아요." 베드로 신부님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답하신다. "맞아요. 그런데 'Good bye'의 의미도 좋아요. 'Got be with you' 신이 늘 세실님과 함께 하기를!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산 묵주입니다. 작은 결혼 선물이에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See you.

모두 Good bye.


이 길은 나에게 꽤 큰 도전이었다. 첫 순례길, 첫 유럽, 서툰 영어, 정보가 없는 산티아고 루트.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악을 생각했을 때 극단적인 최악은 없었기에 시작할 수 있었다. 두렵지만 내딛었던 발걸음 덕분에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 그리고 평범한 일상의 비범함, 사람에 대한 감사함을 얻었다. 시작할 때는 나에 대한 믿음이 작아 괴로웠는데, 걸을수록 나에 대한 믿음이 쌓였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은 나에게 대한 신뢰와 사랑의 보폭이었다. 길 위의 사람들과 자연을 보며 배우는 것도 많았다.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과 환대를 따라하면서 나눌 때마다 가벼워지는 배낭의 무게를 느꼈다. 몸과 마음이 거듭 깨끗해지는 즐거움이었다. 


한 발 내딜 힘만 있으면 우리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모든 부분에서 부족한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산티아고 대성당을 출발점으로 다시 길을 걸으러 간다. 진짜 나의 삶이 있는 곳으로. 각자의 길에서 다시 걷게 될 사랑하는 친구들을 향해 사랑을 보내며 신발 끈을 묶어본다. 


나의 첫 순례길, 사랑하는 친구들

무쵸 그라시아스, 부엔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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