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실 Oct 27. 2024

아름답고 경이로운 환대

산티아고 도착 하루 전

산티아고 도착 하루 전이다. 포르투갈길을 걷는 많은 순례자들은 보통 파드론으로 향한다. 나도 파드론에 있는 알베르게를 미리 예약해두었다. 산티아고가 가까워질수록 순례자들이 많아져 예약 없이 숙소를 잡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걷다가 마음을 바꿔 파드론 마을에 도착하기 4km 전쯤 반대 방향에 있는 헤르본 수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헤르본 수도원은 순례길 초반에 마티아스가 가보고 싶다며 말해준 곳이다.


헤르본 수도원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순례자들을 환대하는 곳이라고 한다. 숙소의 컨디션이 열악해도 그 전통을 느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가시지 않아 파드론의 숙소를 포기하고 헤르본으로 길을 튼 것이다. 하루 최대 30명까지만 수용하는 알베르게라는 말이 있어 바지런히 걸었다. 특별한 경험이 될 것 같아 기대된다.


헤르본 수도원에 도착하니 세 분 정도 수도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 도착한 시간은 1시인데, 수도원 문은 4시에 열린다고 한다. 쪼리 신발에 허름한 신부복을 입은 나이 많은 신부님이 나오셨다. 그리고는 사제실로 따라오라고 손짓하시더니 직접 수확한 자몽을 하나 주셨다. 독일에서 온 커플, 스페인, 헝가리, 영국에서 온 순례자들과 각자 가방 속에 있는 간식을 나눠먹으며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환대 (歡待)
: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


4시가 되었고 헤르본 수도원 호스트 후안의 안내를 받으며 체크인을 했다. 침대만 하나 들어가있는 작은 방에는 수도원에서 사는 고양이가 나를 반겼다. 씻고 돌아오니 샹그리아 파티가 열렸다. 후안이 순례자들끼리 그동안의 여정을 나누는 연결의 장을 마련해준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어로 진행되는 저녁 미사를 드린 뒤, 산티아고 순례길 도착 전 마지막 저녁 만찬 시간을 가졌다. 성당에서 부엌으로 들어와보니 후안 혼자 어마어마한 음식을 준비 중이었다.


파드론 고추를 올리브유에 직접 튀겨주었다. 와..진짜 너무 맛있다. 고추만 잔뜩 튀겨서 접시에 담은 간단해보이는 요리인데 이렇게 맛있을 일인가? (다음날 식당에서 파드론 고추 튀김을 시켜보았는데 맛이 난다..) 이외에도 있는 요리, 없는 요리를 전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와인과 함께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순례길만 15번을 걸었다는 후안은 길 위에서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 위해 이 수도원의 호스트로 봉사 중이라고 한다. 심지어 천주교 신자도 아니라고 한다. 그의 말과 표정과 동작을 보며 사람을 사랑하는 법, 환대하는 법에 대해 배운다. 그를 보고 있으면 이렇게까지 기쁘게 내어줄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어쩌면 한 번 왔다갈 사람들일텐데 말이다. 환대라는 말이 사람이 된다면 그것은 후안이 아닐까 싶다. 후안에게 받은 환대와 사랑이 썪지 않도록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흘려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한참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스페인에서 온 앙카가 묻는다.


"세실, 여기서 가장 오랫동안 걸은 니 이야기가 궁금해. 포르투가 아닌 리스본에서 출발해서 산티아고 코앞까지 걸어왔잖아. 유럽도 처음이고, 순례길도 처음이고, 영어도 서툰데 말야. 내일이 마지막 날인데 지금 무슨 감정을 느껴?"


산티아고 도착 하루 전, 무슨 감정을 느끼냐는 질문이 죽음에 임박한 사람에게 건네는 질문 같았다. 그동안의 삶이 어떻냐고 묻는 그런 질문 말이다. 아주 명확한 한 가지의 감정이 들었다. 그 감정을 알아차리자마자 여러 사람들의 얼굴과 걸으면서 느꼈던 나의 다양한 모습들이 스쳐지나갔다. 말보다 눈물이 먼저 올라와 잠시 침묵하고 이야기했다.


"충만한 감사함을 느껴. 이 길 위에서 받은 친구들의 사랑과 이 길을 걷기로 마음 먹고 끝까지 걸어준 내 자신을 향한 깊은 감사를 느껴. 후회없이 걸은 최고의 길이었어."



헤르본 수도원의 새벽

최신식 숙소가 아님에도, 모든 알베르게를 통틀어 제일 잘 잤다. 후안이 준비해준 아침식사를 먹고 나갈 채비를 해본다. 한국에서 가져온 사진 엽서 하나를 건네고 그와 마지막 포옹을 했다. 인자하게 웃던 후안이 눈을 보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세실, 이 길은 이미 너에게 많은 걸 주었어. 그런데 진짜 까미노는 니가 집에 도착하면 시작돼. 아주 천천히, 어느 날 갑자기 생각날거야. 그리고 그게 니 삶을 조금씩 바꿀거야. 부엔 까미노."


자, 이제 마지막 날이다. 포르투에서 쉬어가며 느낀 것이 있다. 엄청 기대한 날에는 생각대로 더 안 된다는 것이다. 길 위의 여정은 계획되지 않은 일들의 연속이었고, 그것이 삶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배웠다. 남은 길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그냥 걸어야겠다. 도착해서 내가 찾던 천국이 있을 거라는 기대도 내려놓고, 뒤돌아보지 않고 지금밖에 오지 않은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