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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 Oct 27. 2024

마음을 녹이는 고대인의 목욕탕

1. 숲길이 이어지던 길을 걸으며 속상함에 젖었다. 첫번째 순례길을 걸으며 가감없이 나의 감정을 수첩에 옮기고, 때때로 영상에 담고 있다. 영상의 일부는 자기 전 SNS에 매일 기록하고 있다. 솔직하고 다채로운 내 마음과 모습을 잘 기록하는 것이 내가 나에게 준 순례길 미션이었기 때문이다. 휴대폰 사진첩을 비워놓고 와서 용량 걱정 없이 영상 버튼을 눌러놓고 일기를 쓰거나 간식을 먹거나 멍을 때린다. 영상 속 내 얼굴은 글보다 솔직한 감정이 실릴 때가 간혹 있다. 제 3자가 된 것처럼 그 얼굴을 가만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런데 한국의 지인으로부터 이런 연락을 받았다. "뭘 그런 것까지 기록해? 무슨 유튜브야? 캬캬" 안부차 연락한 것이고 친한 사이니 장난 섞인 농담이었겠지만 기록이 진심이었던 나는 전화를 끊고 웃지 못했다. 


2. 알베르게에서 쉬고 있는데 어제 만났던 스위스 할아버지가 들어오신다. 나보다 먼저 출발했는데 3시간이나 늦게 도착하셨다. 할아버지의 고단했을 하루를 생각하니 울컥한다. 할아버지는 나를 보더니 반가운지 두 손을 꼬옥 잡고는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내일은 어디까지 가는지, 발은 괜찮은지 묻는다. 파드론 쪽으로 간다고 하니 그 지역에 아주 유명한 음식이 있다면서 구글에 검색해 이미지를 보여준다. 내가 가까이 가니 화들짝 놀라면서 아직 씻지 못해 땀냄새가 난다고 미안하다고 하신다. 본인의 고단함보다 앞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3. 오늘 머무는 마을 칼다스 데 레이스(Caldes de Reis)에는 스페인의 역사적인 공공 욕조가 있다고 한다. 로마 시대 때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수천년동안 이용할 수 있는 온천이 가능한건가? 마을을 한바퀴 돌고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 찾아갔다. 마을 길 위에 김이 모락모락나는 돌로 만든 욕조가 보인다. 물의 성분이 피부 질환 치료와 스트레스 이완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따뜻한 온천탕에 발을 담그고 눈을 감았다. 속상했던 마음, 타인의 고단함에 울컥했던 마음, 스위스 할아버지의 배려하는 마음. 이런 마음들이 따뜻한 물 안에서 녹는다. 접혀있던 마음이 꽃피듯 천천히 열리고 눈가 부분이 이완되는 기분을 느낀다. 


4. 속상했던 마음도 누그러진다. 비아냥이 아니라 관심의 표현 아닌가. 용기가 많이 필요했던 기록이라 위축되었던 것 같다. 누군가 작은 용기를 보일 때는 어떻게 격려해야하는지 힌트를 배운 셈이다.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있는 힘껏 박수를 쳐야겠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이 생각만으로도 이미 내 자신에게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일테니까. 이제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거창하고 심오한 것처럼 보이는 고민들까지 물 속에 모두 녹아내리고, 단순한 고민 하나만 남는다. "오늘 저녁 뭐 먹지?" 갈리시아 지역에 왔으니 맛있는 해산물 요리를 잔뜩 먹고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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