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순례자, 주영
카페에 들러 콜라를 시키고 카페 밖 파라솔 아래에 앉아 신발을 벗고 있는데, 한국인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분이 있다. "혹시 한국인이세요?"라고 말을 걸자 "네!"하며 반가운 한국말로 화답하신다다. 2008년에 프랑스길을 걷고, 오랜만에 포르투갈길로 다시 순례길을 찾았다는 그녀는 라디오PD 이자 소설을 쓰는 작가였다. 순례길에서 만난 소설가라니. 한국인 여자 순례자를 만난 것도 반가운데 소설을 쓰신다니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연금술사>의 주인공 산티아고가 된 것 같다. 영화나 동화 속 주인공이 빛나는 사람들을 만나며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같이 걸어도 되겠냐는 주영님의 반가운 질문으로 우리는 10km 정도 같이 걸었다. 주영님은 대화할수록 매력적인 분이셨다. 어떤 상황에 대해 긍정적으로 설명하지 않을 때에도 악의 없이 담백하게 툭툭 던지는 말에 나는 빵빵 터졌다. 그러면서도 표정과 말에서 사람과 소설에 대한 사랑이 깊게 느껴졌다. 신기하고 사랑스러운 캐릭터였다. 그렇게 잠깐의 만남을 가지고 헤어진 우리는 기차에서 한번 더 마주쳤다. 기차 안에서는 더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길 위에서 만난 스승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에밀리와 쿡, 마티아스, 라슬로 아저씨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을 다시 떠올리고, 주영님은 첫 순례길에서 만났던 꼬마 친구와의 우정과 2008년부터 지금까지 생일 때마다 엽서를 보내주는 독일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주영님 얼굴을 쳐다보니 문득 걱정이 되었다. 얼굴에 약간의 화성을 입었고, 발이 아파보였다. 그동안 길 위의 까미노 천사들에게 받은 것을 돌려줄 때다. 물집으로 고생했을 때, 혹시몰라 여분으로 사뒀던 물집 밴드와 남은 바세린을 덜어드렸다. 그리고 현지 마트에서 사둔 마스크 팩 한 장을 건넸다. (이래뵈도 두 달 뒤면 결혼하는 9월의 신부다 크크)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눌 때마다 가방이 가벼워진다. 줄 수 있는 것을 모두 나눠주고 가장 가벼운 상태로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기분은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그렇게 헤어지고 이틀 뒤에 우리는 같은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났다. 지금까지 호텔에서 지내시다가 나와의 대화 이후에 알베르게를 예약하셨다고 한다. 또 오늘 걷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마티아스가 내게 말해주었던 'don't hurry. be happy.'가 오늘 주영님 하루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막 빨래를 끝낸 나에게 근처 빨래방에 가서 건조기를 돌릴건데 괜찮으면 선물로 내 빨래도 함께 돌려주고 싶다고 하셨다. 빨래방에 건조기를 돌려놓고 근처 카페에서 와인과 콜라를 마셨다. 오랜만에 한국어로 막힘없이 떠드는 즐거운 대화였다.
자기 전, 수첩에 쎄요(순례자 도장)로 만든 엽서를 한 장 찢었다. 내 수첩을 보고 이 도장이 이쁘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홀로서기의 기쁨이 담긴 도장 엽서에 《연금술사》책의 일부를 써서 드렸다. 마지막으로 뭔가를 드리고 싶었다. 주영님은 그것을 받고 내게 책갈피를 선물로 주셨다. 포르투에 들렀을 때 산 책갈피라고 하는데, 기차가 그려져있다. 주영님과 내가 함께 탄 기차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순례길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오니 집에 택배가 하나 와있다. 주영의 소설 《디어 시스터》다. 회색빛 일상에서 기어코 다정함을 찾는 이야기들이 담겨있었다. 순례길이 내게 무얼 주었는지, 내가 순례길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지 여전히 느끼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