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대로

#2023년 4월의 기록

by 샌디렐라

지난 달에 같은 건물, 다른 층으로 이사했다.

빨리 나가달라고 반 년 넘게 전화하는 집주인 성화에 못이겨, 계약 만기가 한참 남았지만 집을 빼기로 했다.

'새로운 동네로 이사할까' 하고 여기저기 알아보기도 했지만, 원래 살던 집의 컨디션을 따라가긴 힘들었다.

결국 타이밍 좋게 나온 같은 건물 다른 층의 매물이 있어 그 집으로 옮기기로했다.


원래 살던 집은 17층에 남서향이었다. 지하철역 사거리가 한 눈에 들어오고, 각종 프랜차이즈 상점들이 즐비한 뷰였다. 해가 질때 석양이 예쁘긴 했지만, 석양보다 반짝거리는 네온사인 불빛이 통창을 뚫고 들어왔다. 특히, 샤로수길(서울대입구 앞의 먹자 골목)이 바로 코 앞이라 밤이 되면 술집 앞의 온갖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지금 이사오게 된 집은 7층에 북동향이다. 사실 빨래가 잘 마르는 남향을 두고 북향으로 이사하자니 배가 많이 아팠지만, 여러가지 여건을 따졌을때 최선의 선택이었다.

새로온 집은 낮은 상가 단지와 빌라들이 보인다. 해질녘의 아름다운 경치는 없지만, 눈 아픈 네온사인은 좀 덜한 편이다.

대신 저 멀리에 '24시간 사우나' 간판이 보인다.


이전의 집에서는 밤만 되면 집 앞 술집에서 한잔하고 싶은 마음이 스믈스믈 올라왔다. 그게 아니면 사거리의 올리브영이나 다이소에 가서 계획에 없던 것들을 사곤 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곳으로 이사온 후 부터는 평소에 생각도 없던 사우나가 가고 싶어졌다. 괜히 피로도 풀릴 것 같고, 건강도 좋아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우나에 안 간지 족히 5년은 넘은 것 같은데.

견물생심에 나는 결국 5년 만에 사우나를 가게 됐다. 오랜만에 가니 괜히 뻘줌하고 민망했다. 어떻게 이용해야하는 건지도 가물가물해, 카운터 아주머니께 이것 저것 여쭤보기까지 했다. 게다가 드라이기에 넣을 동전이 없어 머리도 제대로 못말린 채로 나왔다.


젖은 머리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보니 문득 이 모든 것이 '창문의 방향'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딜 보고 사는지에 따라 원하는 것이 달라지는 구나.'


술집을 바라보고 살 때는 술 한잔이 그리도 간절하다가, 이젠 사우나라니. 눈에 들면 마음이 생긴다는 말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복기해보니, 요즘은 이전 살던 집에서 보이는 버스 정류장보다 지금 사는 집에서 보이는 정류장을 더 많이 간다. 정말 신기한 노릇이다.


'보이는 것을 원하는 걸 넘어서, 보이는 대로 살고 있구나.'


이래서 늘 인간은 방향을 정하는 일에 무게를 두었나보다. 항해에서도 조타수의 역할이 얼마나 중한가.

그리고 그 방향에 서 있는 선구자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가령 롤모델이라던가, 부모라던가.


'그렇다면 난 앞으로 무엇을 보고 살 것인가' 라는 근복적인 질문에 봉착했다.

무엇을 보는지가 나를 만들어낸다는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는데 내 시신경을 아무렇게나 둘 순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친구 S가 강력 추천했던 스마일라식을 알아봐야겠다.

작가의 이전글불확실함과 불안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