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세상에 내던져진 남자는 기댈 곳이 없다.
어떤 보호도, 배려도, 완충도 없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버틴다.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억울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자는 결국 안다.
배운 대로만 살면, 나를 잃는다는 것을.
남자는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나 살아남는다는 것은
단지 버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구를 따라야 하는가,
무엇을 본받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남자는 언제나 홀로였다.
현시대에서 존경할 만한 롤모델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유능한 남자는 많지만,
내면이 단단한 남자는 드물다.
그래서 남자는 결국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
아버지.
남자는 아버지를 통해 자신을 본다.
아버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나의 미래가 보인다.
그의 강점은 나의 강점이 되고,
그의 약점은 나의 약점이 된다.
아버지 세대의 남자들은
부서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조여서 살아왔다.
두려움도,
결핍도,
외로움도,
모두 강함이라는 이름으로 덮여버렸다.
그렇게 굳은 마음은
세월과 함께 돌이 된다.
우리는 ‘꼰대’라고 부르지만,
그 돌 속에는
무너질까 두려웠던 어린아이가 들어 있다.
그리고 아들은
그 아이를 그대로 물려받는다.
세상이 변해도
내면의 패턴은 유전된다.
DNA는 생김새만 닮게 하지 않는다.
상처도 닮게 한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종종 불편하고, 어색하다.
그러나 이유는 하나다.
둘은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가 숨긴 약함을 본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그 결심만으로는 운명이 바뀌지 않는다.
아버지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늙어갔다면,
그리고 나 역시 그 상처를 마주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아들은 그 상처의 형태까지 그대로 물려받는다.
그렇게 아들은
결국 아버지를 닮는다.
우리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버지의 상처를 반복한다.
아버지 역시 아들을 통해
자신의 어린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방어막 없이 드러난 자기 자신이다.
견디기 어려운 진실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내리친다.
“사내자식이 그렇게 마음 약해서 되겠냐.”
“남자가 그런 일로 울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가 자신의 내면의 어린아이를 공격하는 것과 같다.
마주하기 두려워
감출 수밖에 없던 그 얼굴.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점점 알아차린다.
역할을 벗은 아버지는
그저 그 시대를 견디며 살아온
한 명의 남자였다는 것을.
그도 나와 똑같았다.
어린아이였고,
청년이었던 시절이 있었음을.
그의 나약함을 이해하는 순간,
비로소 나 역시 이해된다.
그리고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돌을
그대로 쥐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 돌 속에 갇혀 있던
나의 어린아이를 꺼내어
다시 숨 쉬게 할 것인가.
남자는 닮았다.
그러나 어떻게 닮을지는, 내가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