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무너졌다

모든 것이

by 시더루츠

남자는 오래 버텼다. 버티는 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참는 법,
삼키는 법,
넘어가는 법,
괜찮은 척하는 법.


남자는 버티는 것으로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무너지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방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아주 사소한 일 앞에서
남자는 갑자기 멈춰 섰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일도 아니었지만,
내부에서는 오래된 무언가에
조용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무너짐은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일어난다.

싸울 힘도,
버틸 힘도,
이겨내야 한다는 의지도
그 순간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가 아니었다.
오히려 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더 이상 나를 잃으며 살지 않겠다는
마지막 본능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상처를 숨기는 방식도,
버티는 방식도,
무너지는 방식도


나는 무섭게 그를 닮아 있었다.

아버지는 약해지지 않기 위해 강한 척했고,

나는 그 강한 척을 닮았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나를 보았다.
강함의 반대는 약함이 아니라,
강한 척하던 나였다.


무너진 것은 나의 인생이 아니라,
아버지처럼 살아온 나의 가면이었다.

세상과 관계,
그리고 배워온 방식들을 그대로 답습하며 살아온 나는
결국 내가 아닌 삶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삶은 오래갈 수 없다.
언젠가는 스스로 붕괴된다.

그리고 그 무너짐은
종말이 아니라 시작이다.


가면이 무너져야
얼굴이 드러난다.

가슴이 열리고
감정이 돌아온다.
남자는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 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제 선택해야 한다.
진정으로 내가 될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그림자를 따라
평생 그의 상처를 반복하며 살아갈 것인가.


놀랍게도,
무너짐은 자유였다.
그 순간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 아니라

나로서 홀로 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미뤄왔던,
피해왔던
‘나’와 마주할 시간이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되찾아야 할 힘이다.


그러나
가면이 무너졌다고 해서
곧바로 나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십 년 동안
스스로를 외면하고,
타자와 세계에 맞추며 살아온 나에게


갑자기 세상의 모든 것이 혐오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선과 악,
가치와 도덕,
거짓과 위선,
내 주변의 기대와 기준,

그리고 알 수 없는 거대한 흐름들까지.

그 모든 것이 나를 억눌러왔다는 사실이
뒤늦게 밀려왔다.

나는 몰아붙여졌고, 내몰렸고,
그럼에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소속되기 위해 애쓰고,
어딘가의 일부가 되어야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간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고,
산을 넘으면 또 산이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내가 믿어온 모든 신념,
지켜온 관계,

그리고 그 기반들을
한 번 내려놓아 보기로.

성을 허물듯
내 삶의 구조를 무너뜨렸다.


목표도 잃고, 방향도 잃은 채
나는 그렇게 방랑자가 되었고,
세상은 나를 ‘낙오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알았다.

이 무너짐 또한
나를 되찾는 여정의 일부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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