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마주했다.

두려움을

by 시더루츠

더 이상

도망칠 곳이 남아 있지 않았다.

뒤를 돌아봐도 벽,
앞을 봐도 벽.

어디로 몸을 틀어도

부딪히는 건 나 자신 뿐이었다.


이제는 알았다.

누군가를 탓할 수도,
상황을 핑계 댈 수도 없다는 것을.


버티면 죽고,
마주하면 산다.


머리는 알고 있었지만,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눈을 감자, 수많은 장면들이 밀려왔다.


그 모든 장면 사이,

언제나 같은 사람이 서 있었다.


도망치는 나.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또 다른 나.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두려워했던 건
세상이 아니었다.


실패도,
망하는 것도,
거절당하는 것도
진짜 두려움이 아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
보게 되는 일이었다.


두려움은 괴물이 아니었다.
두려움은 너무 오래 혼자 남겨둔
나였다.


남자는 떠올렸다.


입 안이 쓰도록 마셨던 술잔,
어둠 속에서 혼자 켜놓은 모니터 불빛,
감정을 잠재우려던 켰던 야한 영상의 잔상,
레벨을 올리면 현실의 불안도 사라질 것처럼
몰두했던 게임 화면,
누군가와 연결된 척하며
아무 의미 없이 주고받았던 메시지들.


쾌락의 조각들은

잠시 나를 덮어줬지만
결국 아무것도 채워주지 못했다.


그 모든 장면 뒤에는
언제나 혼자
가만히 버려져 있었다.


고요가 찾아오려는 순간마다
무언가를 더 집어넣었다.


고요는 공포였고
침묵은 심문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나의 감정,
그것을 마주하기가
너무 두려웠다.


그러나 그날은
도망칠 힘조차 남지 않았다.

움직일 수도 없었고,
딴생각으로 도망칠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그 고요를 그대로 버텨야 했다.


감정이 하나씩 올라왔다

이상한 감정들이었다.


처음에는 짜증이 올라왔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지.”


그다음에는 억울함이 올라왔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다음에는 분노가 올라왔다.

“다 너희 때문이야.”

“나를 제대로 사랑해주지 못한 어른들,

나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비로소 드러난 감정이 있었다.


두려움.


잠시 멈춰 그 감정을 바라보고 있자
이상하게도 알 수 있었다.

이 감정들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보지 않기 위해

묻어두었던 것들이었다는 사실을.


그 순간,
그동안 보지 않기 위해 덮어두었던 것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남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부정적인 모든 감정을 눌러 놓았던 자리.

그것들은 화가 나 있었고,
분노하고 있었고,
울고 있었다.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저 숨겨져 있었을 뿐이었다.


도덕에 눌린 감정,
돈에 눌린 욕망,
가족에 눌린 선택들,
관계에 눌린 진짜 마음,
일에 짓눌린 자존감.


좋은 부분만 남기고,
부정적인 부분은 없애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은 내 안에 그대로 쌓여 있었다.


그것들은 혐오스럽고, 끔찍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눈물 날 정도로 슬펐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버려진 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감정 하나가
천천히 떠올랐다.


의식조차 하고 싶지 않았고,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고,
인정은 더더욱 하고 싶지 않았던
단 하나의 진실.


나는... 사랑받고 싶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릴 만큼 불편한 마음,
구역질이 날 정도로 부끄럽고,
어디에도 내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


누군가 나를 바라봐주길 바랐고,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해주길 바랐고,
내가 실패해도 떠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 마음 하나가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모든 가면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간절해서
나는 그 마음을 가장 깊은 어둠 속에
묻어버렸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두려워하고 미워했던 것은
내 안의 ‘어두운 감정들’이 아니라,
그 감정들을 버리면서
함께 버려졌던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돌이켜 보면

나는 늘 나를 감시했었다.

착하게 굴어야 했고,
도덕적이어야 했고,
옳은 선택만 해야 했다.

한 번이라도 틀리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망칠 곳이 사라진 그날,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도망치는 동안에도

두려움은 한 번도
내 안에서 사라진 적이 없었다.

기쁨을 느낄 때도,
쾌락에 취해 있을 때도,
사소한 승리에 들떠 있을 때조차


그 감정은
어딘가 깊은 곳에서
아주 조용히 살아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도 외면했고,
모르고도 피해 다녔다.


그러나 두려움은
언제나 내 안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문득
아버지를 떠올렸다.

술에 취해 있던 밤들,
말없이 TV만 보던 뒷모습,
대답 대신 한숨으로 흘려보냈던 질문들.


나는 오래도록 믿어왔다.

아버지는
나약해서 도망친 거라고.

현실이 무서워서
책임이 무서워서
감정을 마주하기 싫어서

술에 숨고,
침묵에 숨고,
작은 방 안에 숨어버린 거라고.


하지만
벽 앞에 선 그날,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는 방식조차
나는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어디서부터
무엇까지가 아버지이고,
어디서부터가 나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나는 아버지가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처럼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이미
나는 그를 닮아 있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팠다.


그래서 더욱
도망쳤는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오래 숨을 쉬었다.


특별한 명상도 아니고,
높은 의식 상태도 아니었다.


그저
도망칠 힘조차 남지 않은 몸으로
눈을 감고
호흡을 세고 있을 뿐이었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고,

그 사이사이에
감정들이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의 끝에
늘 같은 감정이 있었다.

두려움.


두려움.

이번엔 그것이
머릿속 개념이 아니라
가슴에서,
복부에서,
온몸에서 올라왔다.


나는 두려움을 마주했다.


나는 두려웠다.

버려질까 봐 두려웠고,
실패할까 봐 두려웠고,
실패한 내 모습을 본 사람들이
뒤에서 나를 어떻게 말할지
두려웠다.


무엇보다
내가 생각보다 별것 아닐까 봐
두려웠다.

애써 만들어온 이미지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있는 그대로의 나’가 드러났을 때,

아무도 남지 않을까 봐
그게 정말로 무서웠다.


그 두려움과 마주한 순간,
나는 이해했다.

왜 그렇게 도망쳤는지.

왜 술에 기대었는지,
왜 화면에 기대었는지,
왜 관계와 섹스와 일과 여행까지
모두 피난처로 삼았는지.


그 모든 것은
단지 하나를 피하기 위한
거대한 우회로였다.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볼까 봐,

그게 너무 두려워서.


알고 나자
왠지 허탈했다.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것은
어떤 초자연적인 심판도,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갈 실패도 아니었다.


그저
“나는 이렇다”
라고 말하는 일 하나였다.


나는 아직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습관은 남아 있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도 남아 있고,
쾌락의 유혹도 사라지지 않았다.

두려움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여전히 내 안에 있었다.


다만
이제는 그 두려움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그날 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오래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 채
억지로 버티던 표정,

항상 “괜찮다”라고 말하면서
눈빛만은 늘 불안해하던 나.


나는 속으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 인정하자.
나는 겁이 났어.

버려질까 봐, 혼날까 봐,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을까...

그래서 도망친 거야.”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순간,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조금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강해진 것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용감해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도망치던 발걸음을
잠시 멈춘 것뿐이다.


그 자리에 서서
떨리는 몸으로,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의 두려움을
똑바로 바라본 것뿐이다.


그것이
살기 위한 투쟁의 시작이었다.

두려움을 없애려는 싸움이 아니라,
두려움을 끌어안고서도
한 발 내디뎌보려는 몸부림.


도망치지 않는 연습,
도망치지 않은 하루,
도망치지 않은 한 번의 선택.


그 모든 것이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남자를
다른 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처음으로,
그 두려움을 끌어안은 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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