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의 언어와 개인의 삶 사이에서
나는 사피엔스, 총·균·쇠, 이기적 유전자 이 세 권의 책을 모두 끝까지 읽지 않았다.
큰 관심도 없었고, 솔직히 말하면 귀찮았기 때문이다. 다만 강의나 요약을 통해 대략 어떤 이야기인지는 훑어본 적이 있다. 핵심은 단순하다.
사피엔스는 인류가 믿어온 허구로,
총·균·쇠는 환경으로,
이기적 유전자는 유전자로 인간과 집단, 그리고 인류의 흐름을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그중 어느 하나도 절대적인 정답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보고자 하면 그렇게 보일 뿐이다. 세 가지를 함께 놓고 보면
개개인의 서사나 고유한 삶보다는 집단과 드러난 데이터에 더 의존하고 있으며,
인간의 자유의지는 상당 부분 축소되어 있는 듯 보인다.
한편 서구 사상이 유입되기 전, 우리 조상들은 유학에 깊이 심취했다. 사람의 마음을 연구했고,
인의예지와 이와 기를 사유하며 드러나지 않은 본질을 보고자 했다.
또한 형이상학을 형이하학으로 풀어내려 했던 시도였다.
반대로 서구는 대체로 형이하학을 통해 형이상학을 정립하려 하는 것 같다.
조상들이 남긴 이 유산은 이 모든 것들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다만 나는 이 둘이 서로 대립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둘은 경쟁이 아니라 보완의 관계다. 그 책들의 저자들이 왜 그런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개인적인 경험이나 관찰이 먼저 있었고, 그것을 확증 편향의 형태로 이론화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집단과 별개로, 모든 서사는 개인으로부터 출발한다. 자신을 정립하고,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다.
많은 초월적 개념들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랑, 용기, 믿음 같은 단어들은 개개인에게 너무 다르게 적용되기에 추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깊이 와닿기 어렵고, 또한 가장 깊게 와닿을 수 있기도 하다.
반대로 지나치게 객체적인 개념과 사고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재편되고, 부서진다.
사피엔스의 저자가 농업 사회를 거대한 사기극처럼 묘사한 것도 그렇다. 그 평가는 더 많은 시간이 지난 뒤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이미 우리는 농업 사회를 거쳐 성장한 위치에 서 있다. 다시 그 시점으로 돌아가 동일한 인식과 판단을 할 수는 없다. 가보지 않은 길의 전개를 지금의 자리에서 단정하는 일은 우리의 영역을 벗어난다.
과거를 해석하는 일도,
미래를 전망하는 일도
결국은 모두 현재에 달려 있다.
지금의 내가 어떤 상태에 서 있느냐에 따라
과거와 미래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을 하나의 변수로 설명하는 일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각자가 어떤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 역시 인간이라는 개인의 경험과 사고의 조건 안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인간을 바라보면, 그것은 마치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변화를 겪기 위해 이 자리에 놓인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핵심은 드러난 태도나 집단의 결과가 아니라, 정말로 개개인의 마음과 사고, 감정에 있다.
인간은 마치 다양한 충격을 겪도록 만들어진 존재인 듯하다. 물리적인 충격, 감정적인 충격, 그리고 이성적인 충격. 크게 보면 이 세 가지다.
우리의 몸과 마음, 사고는 가장 좋고 편한 상태를 추구하지만, 편안함은 곧 권태가 되고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흔들린다. 그 흔들림은 시련이나 고통이라 불리기도 하고, 상처가 되거나 각성이 되며, 때로는 트라우마로, 때로는 변화로 남는다. 그리고 그 작용은 모든 인간에게 전혀 다르게 적용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다. 환경이나 유전자, 혹은 이 땅에 먼저 형성된 구조들이
인간을 종속시키고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그것들은 단단한 세계 속으로 들어온 개개인의 인간과 부딪히며 새롭게 형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 자리에 왔을까.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하다 가는 걸까. 아마도 그것은
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자신의 삶을 말이다. 부딪히고, 깎이고, 때로는 이기고 지며, 가끔은 쉬기도 하면서 그렇게 세상과 자신을 알아간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세상을 통해 나를 아는 것은 불완전하다.
세상을 통해 본 나는 끝내 설명될 수 없다.
나를 통해 세상을 아는 것 또한 완전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나를 알아갈수록 세상 또한 함께 드러난다는 뜻이다.
나는
행함으로써 나를 알고,
느낌으로써 나를 알고,
사고함으로써 나를 알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 자체가
인간이라는 존재의 이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