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형님께서 6시 30분에 일어나신다기에 나도 그때쯤 같이 일어나게 될 줄 알았다. 당연히 깨워주실 거라 생각했는데, 이미 먼저 일어나 나가신 뒤였다. 결국 나는 7시 30분쯤에야 눈을 떴다. 제법 늦잠이었다. 씻고 나와 이 집의 아들인 재현이와 함께 EBS 만화를 보며 밥을 먹었다. 아침을 먹고 나니 슬슬 움직여야 할 것 같아 짐을 정리하며 지도를 펼쳐 들었다. 오늘은 카이스트에 들렀다가 근처의 지질 박물관과 화폐 박물관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대전 월드컵경기장까지 가볼 생각이었다. 머릿속에서 대충 하루의 동선이 그려졌다.
짐을 챙기고 있는데 누님께서 여행 중에 먹으라며 방울토마토를 한 봉지 챙겨주셨다. 혹시 필요한 것이 없냐고 꽤 집요하게 물어보셨지만, 그때의 나는 딱히 필요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 상태였다. 괜찮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고 방울토마토만 가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하필 비가 왔다. 우산이 없어 며칠 전 꽤 고생했던 기억이 바로 떠올랐다. 그걸 눈치채셨는지 누님께서 쌈박한 검은색 우산 하나를 건네주셨다. 마침 누님도 사무실에 가야 한다며 재현이와 함께 집을 나섰다.
길을 걸으며 누님께서 집안 이야기를 조금 들려주셨다. 결혼 후 이사를 꽤 많이 다니셨고, 앞으로는 강원도로 다시 옮기게 될 것 같다고 하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이 갈라졌다. 나는 그동안 신세 진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드렸고, 그렇게 누님과 헤어졌다.
누님과 헤어진 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카메라였다. 여행을 계속하려면 아무래도 카메라가 필요했다. 근처에서 전자기기 판매점을 찾다가 우연히 하이마트를 발견해 들어갔다. 카메라를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했더니, 하이마트는 비싸니 삼성 전문 매장에 가보라고 하셨다. 우리 엄마는 삼성 제품을 유난히 좋아하신다. 그래서 슬쩍 하이마트를 빠져나와 아까 지나오면서 봤던 삼성 디지털 매장을 찾아갔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사진기 종류가 네 가지밖에 없었다. 대부분이 디지털카메라였고, 필름카메라는 점점 자리를 잃어가는 분위기였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싼 것이 6만 1천 원, 그 다음은 바로 20만 원짜리였다. 말 그대로 중간이 없는 구성이었다.
결국 엄마와 다시 통화를 하고 6만 1천 원짜리를 사기로 했다. 계산은 엄마가 직접 이체해 주시기로 하고, 나는 입금이 확인될 때까지 매장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매장 누님께 혹시 조금 깎아주실 수 없냐고 슬쩍 여쭤봤더니 천 원을 깎아주셨다. 나는 입금이 확인될 때까지 매장 한쪽에서 일지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다시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입금을 했으니 확인해 보라고 하셨다. 매장 누님과 함께 계좌를 확인한 뒤, 계산을 마무리했다. 계산을 마치고는 서비스도 좀 달라고 농담처럼 말했더니 웃으시면서 필름과 건전지를 챙겨주셨다.
기분 좋게 인사를 드리고 매장을 나왔다. 이제 오늘의 첫 목적지인 카이스트로 향할 차례였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방향을 잘못 들었다. 다시 돌아가기엔 애매한 위치라 어쩔 수 없이 충남대 캠퍼스를 가로질러 지나가게 됐다. 마침 어제까지 축제를 했던 모양이었다. 곳곳에는 치우지 못한 쓰레기 더미가 남아 있었고, 특히 막걸리 병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벽과 게시판에는 포스터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그렇게 충남대 정문으로 빠져나와 이번에는 곧장 카이스트를 향했다.
카이스트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일반적인 대학교라기보다 어딘가 연구소 같은 느낌이 강했다. 충남대에서는 플랜카드나 모집 포스터가 여기저기 눈에 띄었는데, 카이스트는 그런 것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정말 먼지 하나 없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정돈되어 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깔끔해서 조금 썰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조금 의외였던 건 카이스트 기념품 판매점이 따로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내가 카이스트에 들어온 이유가 구경만은 아니었다. 사실 가장 큰 목적은 밥이었다.
지나다니는 학생들에게 길을 물어 겨우 식당을 찾아갔다. 예상대로 식당은 꽤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문제는 식당 앞까지 와놓고도 선뜻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괜히 머쓱한 기분도 들고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수는 없었다. 결국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는 식권을 파는 학생분이 있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여행 중인데 밥을 좀 먹을 수 있겠냐고 말을 꺼냈다. 솔직히 이런 부탁은 스스로 생각해도 꽤 난감한 종류의 부탁이었다. 학생분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다며 창가 쪽에 계신 분들께 한번 여쭤보라고 했다. 창가 쪽에는 아저씨 세 분이 식사를 하고 계셨다. 나는 다가가 무전여행 중인데 밥을 좀 얻어먹을 수 있겠냐고 조심스럽게 부탁을 드렸다. 그중 한 분이 어디서 왔냐고 물으셨다. 성남에서 왔다고 하자 다른 한 분이 식권을 한 장이 아니라 두 장이나 건네주셨다. 아마 성남과 인연이 있으신 듯했다. 식권을 건네주신 분은 점심도 여기서 먹고 저녁도 먹고 가라는 뜻이라며 웃으셨다.
식권을 내고 급식을 받아 식탁에 앉았다. 식당 왼쪽 벽에는 대형 평면 TV가 걸려 있었고, 마침 테니스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내가 앉은 테이블 반대편 끝에서는 나이가 지긋한 교수님으로 보이는 분과 비교적 젊은 교수님이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처음에는 과학 분야 이야기인 듯하더니 곧 교수 사회 이야기가 이어졌고, 어느 순간에는 MP3를 두고 꽤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밥을 다 먹은 뒤, 아까 식권을 팔던 학생분에게 다가가 식사 잘했다는 인사를 드렸다. 아까 식권을 건네주신 아저씨들을 대신해서 전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박물관에 가기 위해 동문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학생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정리하면 결국 동쪽으로 가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식당을 나와 동문 쪽으로 향했다. 막상 동문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도착해 보니 바리케이드처럼 막혀 있어 그대로는 지나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담벼락 옆으로 겨우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작은 틈이 보였다. 결국 그 길로 카이스트를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이번에는 지질 박물관의 위치를 몰라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잠깐 헤매다가 이리저리 길을 묻고 찾아가 결국 박물관에 도착했다. 비가 와서인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실상 없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나는 그런 분위기가 오히려 좋다. 사람이 많으면 괜히 신경이 쓰여서 제대로 구경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1층 전시는 주로 생물에 관한 내용이었다. 공룡 화석과 식물 화석, 생명의 기원에 관한 설명들이 이어졌고, 한쪽에는 우주와 관련된 전시도 마련되어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분위기가 바뀌어 광물 전시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광석과 결정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꽤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가족이 들어오면서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꼬마들이 뛰어다니는 바람에 주변이 금세 소란스러워졌고, 덕분에 집중해서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대로 새로운 지식을 얻은 기분으로 지질박물관을 나와 화폐박물관으로 향했다. 화폐박물관은 지질박물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길을 옮겨 걷던 중, 보도 위를 느릿느릿 지나가는 작은 달팽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자칫하면 그대로 밟힐 수도 있는 위치였다. 잠깐 멈춰 서서 그 녀석을 집어 들고 근처 나뭇잎 위에 조심히 올려놓은 뒤 다시 길을 걸었다.
곧 화폐박물관에 도착했다. 1층 전시는 동전과 엽전에 관한 내용이 중심이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단체 관광을 온 어르신들과 마주쳤다. 생각보다 꽤 시끌벅적했다. 상황을 보니 조용히 구경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별수 없이 나는 일부러 속도를 늦춰 천천히 둘러보기로 했다. 다행히 어르신들은 전시를 오래 보지 않고 비교적 빠르게 지나가셨다. 그렇게 한 바퀴 빠져나가신 뒤에야 나도 본격적으로 1층 전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꼼꼼히 읽어가며 보느라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머물렀던 것 같다. 2층으로 올라가니 이번에는 지폐 전시가 이어졌다. 특히 위조지폐에 관한 부분이 꽤 흥미로웠다. 평소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지폐 속 숨은 장치들이 설명되어 있었는데, 말 그대로 ‘숨은그림찾기’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부분들을 하나씩 확인하며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창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직원 한 분이 올라와 오후 5시가 되면 문을 닫아야 한다며 천천히 내려와 달라고 말했다. 사실 전시를 다 보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우표와 메달 전시는 대충 훑어보는 정도로 마무리하고 박물관을 나와야 했다.
나는 다시 카이스트로 향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두 곳의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어느새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어 있었다. 아직 봄이라 그런지, 게다가 비까지 한 번 지나간 뒤라 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카이스트 식당에 들어가 보니 메뉴는 한식과 일식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갈비탕이라는 말에 이끌려 한식을 선택했다. 그런데 막상 갈비탕을 받아와 숟가락으로 뒤적여 보니 상황이 조금 달랐다. 고기라고는 거의 보이지 않고 뼈만 덩그러니 들어있었다. 그냥 일식 먹을걸 그랬다. 그래도 이렇게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남김없이 식사를 마쳤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아까 식권을 팔던 학생에게 다시 가 인사를 드렸다. 식사 잘했다는 말을 전하고 식당을 나왔다. 그렇게 카이스트를 빠져나와 다음 목적지인 월드컵경기장으로 향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지금쯤 경기가 한창일 시간이었다. 경기장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역시나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괜히 더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경기장 주변을 둘러보니 대부분의 출입문은 막혀 있었고 서문만 열려 있었다. 막상 안으로 들어가려 하니 내부 입구마다 경호원들이 서 있었다. 잠깐만 구경하고 바로 나오겠다고 조심스럽게 부탁했더니 의외로 선뜻 들어가도 된다고 했다. 경기는 이미 후반 67분쯤 진행되고 있었다. 잠깐만 보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계속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잠깐’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가 되어버렸다. 경기를 보다 보니 심판 판정이 조금 묘했다. 대전보다 부천 쪽에 조금 더 유리하게 흘러가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편파적으로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1대 0으로 앞서고 있던 대전은 종료 4분을 남기고 부천에게 골을 내주며 결국 동점이 됐고, 경기는 그대로 무승부로 끝났다. 비록 결과는 아쉬웠지만 나에게는 처음으로 직접 관람한 축구 경기였다. 경기장의 분위기와 함성, 그 현장감만으로도 충분히 들뜨는 경험이었다.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또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나는 바로 일어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경기장이 천천히 정리되는 모습을 구경하며 일지를 쓰고 있었다. 막판에 무승부로 끝난 것이 화가 났는지, 대전 응원단 쪽에서 부천 응원단을 향해 “잘 가라, 개새X들아!”라고 외쳐댔다. 그러자 부천 쪽에서도 대전 쪽을 향해 조롱하듯 뭐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순간 분위기가 험해졌다. 대전 응원단 쪽 몇 명이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 부천 쪽으로 달려가며 “야! 저 새X들 못 가게 잡아!”라고 외쳤다. 그 모습을 본 경기장 운영진이 어느새 경찰 한 부대를 데리고 와 양쪽 응원단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런데도 양쪽은 경찰을 밀치며 계속 붙으려 했다. 아직 경기장을 빠져나가지 않은 적지 않은 관중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그쪽으로 쏠렸다. 집단 싸움이 벌어질 듯 말 듯 거친 분위기가 이어지던 중, 부천 쪽의 한 사람이 들고 있던 대형 깃발을 화가 난 듯 경기장 안쪽으로 거칠게 던졌다. 마침 아래에서 볼보이를 하던 고등학생이 그 깃발에 맞을 뻔했다. 그 학생은 깃발을 던진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더니 거칠게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꽤 무서운 눈빛이었다. 결국 응원단들은 경찰의 제지로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갔고, 나도 그 분위기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막상 나와 보니 상황은 어느 정도 정리된 분위기였고, 부천 쪽에서도 사과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 싸움 구경이 최고의 볼거리다.
오늘은 시간이 꽤 늦었다. 게다가 다시 대전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누님 집을 또 찾아가기도 미안했다. 결국 오늘 밤은 아파트에서 몰래 자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경기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입구가 전부 암호식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면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는, 꽤 ‘최첨단’ 아파트들이었다. 결국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봤지만, 가는 곳마다 비슷한 구조였다.
그래도 일단 씻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근처 상가 건물 화장실에 들어가 대충 몸을 정리하고 양치도 했다. 그리고 건물을 나오면서 벼룩시장과 교차로 신문을 챙겼다. 밤에 잘 때 바닥에 깔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계속 아파트 단지를 헤매고 있는데, 마침 이사 중인 건물을 하나 발견했다. 문도 열려 있었다.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까지 올라간 뒤, 계단을 통해 두 층을 더 올라가니 옥상으로 이어지는 공간이 나왔다. 바로 아래에 주거 공간이 있는 구조와 달리, 중간에 한 층이 더 비어 있는 형태였다. 그 2층 정도의 여유 공간이 묘하게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사람들 생활 공간과 조금 떨어져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는지, 꽤 아늑하게 느껴졌다. 나는 신문지를 대충 바닥에 깔고 자리를 만들었다. 남는 신문지는 신발 안에 쑤셔 넣었다. 냄새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조금 읽다가 방울토마토를 몇 개 집어먹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대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