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 13일 목요일

by 최규성

자는 중에 주인인지 손님인지 계속 왔다 갔다 들락거려 잠을 설쳤다. 문 여닫는 소리와 인기척이 끊이지 않아 깊이 잠들지 못했다. 8시 20분쯤 일어나 샤워를 하고, 짐을 정리한 뒤 지도를 확인했다.


밖으로 나오니 구름이 조금 끼어 있었지만 대체로 맑은 날씨였다. 젖은 빨래를 말리기엔 나쁘지 않은 공기였다.


도로 쪽으로 나가면서 중앙시장을 지나 순댓국집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40번 도로에 도착해 ‘공주 태워주세요’라고 적은 종이를 들고 서서 차를 잡기 시작했다. 20분쯤 지났을까, 하얀색 에스페로 한 대가 멈춰 섰다. 에스페로는 나에게 꽤 익숙한 차다. 얼마 전 새 차를 뽑긴 했지만, 우리 가족이 10년 넘게 타고 다니던 차가 바로 에스페로였다. 그것도 하얀색.


참 친절한 분이셨다. 목포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하라며 명함까지 쥐여주신 아저씨는, 대학교 구경이라도 한 번 해보라며 공주대 정문 앞에 나를 내려주셨다.


마침... 밥 때다. 학교 정문 앞 지도에서 위치를 분명히 봐뒀는데, 교정을 올라오는 사이 머릿속에서 말끔히 휘발되어 버렸다. 별수 없이 분수대 근처 나무그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양말부터 홀랑 벗어 던졌다. 해방감과 함께 밀려오는 제법 묵직한 발 냄새. 그 위로 학생들의 신청곡인 듯 잔잔한 음악과 대학 방송이 라디오처럼 흘러나왔다.


양말을 다시 챙겨 신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까 보아두었던 식당의 위치를 곱씹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제법 깊숙한 곳에 숨어 있었다. 식당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입구에서 단체로 식사 중이신 아주머니들과 마주쳤다. 슬쩍 다가가 무전여행 중인데 밥 한 끼 얻어먹을 수 있겠느냐며 정중히 여쭈었더니, 웬걸, 아주머니들의 열렬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어디서 왔는지, 혼자인지, 며칠째인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여자친구는 있는지... 엄청난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겨우 밥을 퍼 와 아주머니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식사를 거의 마쳐가던 아주머니들이 한 분씩 일어나시는데, 그중 한 분이 오늘 밤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며 선뜻 제안을 하셨다. 다 먹고 주방 뒤쪽으로 오면 연락처를 알려주겠다는 말씀에, 나는 너무 감사했다.


식사를 이어가던 중, 여학생 두 명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나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듯(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질문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자리를 뜨는 척하다가 갑자기 다시 돌아와 연락처를 묻는 게 아닌가. 오랜만에 겪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찰나의 호기심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관심일 뿐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결국 '유학을 떠난다'는 핑계를 조심스레 건넸고, 여학생들은 아쉬운 듯 금방 발걸음을 돌려 멀어졌다.


식사를 마친 뒤 식당 뒤편으로 향해 아주머니를 뵈었고, 소중한 연락처를 건네받았다. 아주머니께서는 정이 담긴 찐빵과 우유, 요구르트까지 살뜰히 챙겨주셨다. 이따 저녁에 뵙겠다는 인사를 뒤로하고 캠퍼스를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나가는 길에 아까 마주쳤던 여학생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으나, 가벼운 목례만 남긴 채 발걸음을 옮겼다.


학교 문은 나섰지만, 목적지인 무령왕릉의 정확한 위치를 몰라 한참을 헤매게 되었다. 그렇게 의도치 않은 방황을 이어가던 중 문득 경찰서 옆을 지나가는데, 웬 새끼 강아지 한 마리가 묶여 있는 게 보였다. 녀석이 부디 잘 먹고 복실복실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아까 받은 소중한 찐빵 두 개를 떼어 건네주었다.


길을 헤매던 중 지나가시던 할아버지 한 분을 붙잡고 길을 물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아주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지만, 죄송하게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대략적인 방향만 짐작한 채 다시 발걸음을 뗐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무령왕릉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타났고, 이어서 탁 트인 금강의 물줄기가 눈앞에 펼쳐졌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강인데도 세속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듯한 그 풍경이 참으로 근사했다.


감탄을 머금고 다리를 건너기 시작해 중간쯤 이르렀을까. 아까 길을 여쭸던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쌩 달려오시더니, 못내 마음이 쓰이셨는지 다시 한번 길을 상세히 일러주시는 게 아닌가. 다리를 거의 다 건넜을 무렵에는 한 아주머니가 저기 꿩 두 마리가 있다며 잡으러 가셨다. 내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의아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정말 암꿩 한 마리가 숨어 있었다. 그 아주머니, 시력이 참으로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무령왕릉에 당도하기 직전, 관광안내소 앞에서 자전거 여행 중인 이를 만났다. 같은 길 위의 방랑자라는 친밀감에 반갑게 말을 건넸지만, 그는 다른 여행자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건조하게 몇 마디 주고받더니 이내 시선을 지도에 고정해 버렸다. 무안함을 뒤로하고 나 역시 안내소에서 지도를 한 부 챙겨 들었다.


매표소에 다가가 무전여행 중인 사정을 정중히 말씀드리니, 감사하게도 흔쾌히 관람을 허락해 주셨다. 전시관의 유물들을 흥미롭게 둘러본 뒤 드디어 진짜 무령왕릉을 마주하려 했으나, 야속하게도 ‘수리 중’이라는 안내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슬쩍 보니 문이 열려 있는 게 아닌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몰래 발을 들였지만, 안쪽을 지키던 직원에게 단박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별수 없이 근처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밀린 일기를 끄적이며 아주머니가 싸주신 찐빵을 베어 물고, 우유와 요구르트까지 야무지게 들이켰다. 그렇게 한참을 쉬고 있는데, 나이 지긋한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이 곁을 지나갔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데스네~” 소리가 왠지 모를 이국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이제는 고장 난 카메라를 손볼 차례였다. 부여의 한 사진관 아저씨께서 공주고등학교 옆에 있는 사진관을 꼭 가보라고 신신당부하며 추천해주셨기 때문이다. 천근만근 같은 몸을 이끌고 겨우 사진관에 도착해 아저씨께 간곡히 수리를 부탁드렸다. 아저씨는 안경 너머로 내 카메라를 이리저리 살피시더니...


"잘쓰면 되긴 하겠는 AS 받을려면 시간이 오래 걸려요"


부품을 주문하고 수리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거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아쉬운 대로 인사를 드리고 사진관을 나섰다. 아무래도 부품 수급이 원활한 대도시, 대전에 가서 고치는 게 낫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발걸음을 옮겨 공산성으로 향하는 길, 우연히 재래시장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그러다 봉고 트럭 뒤 철조망 속에 갇힌 개들을 보았다. 보통의 개들이라면 낯선 이를 보고 짖어댔을 텐데, 이 녀석들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듯 지독히도 암울한 분위기를 풍기며 슬픈 눈으로 내게 호소하고 있었다. 그 눈망울을 마주하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아 마음이 아려왔다. 당장이라도 전부 사서 풀어주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내 처지가 그러질 못했다.


안타까운 마음을 겨우 추스르며 공산성에 도착하니 어느덧 오후 5시 30분.


원래는 입장료를 받지만, 제법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다행히 무료로 통과했다. 대학 식당 아주머니와의 약속 시간을 맞춰야 했기에 그리 여유롭게 둘러볼 상황은 아니었다. 서둘러 성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아까 무령왕릉에서 마주쳤던 외국인 부인 두 명이 보였다. 모르는 척 스쳐 지나가려던 찰나,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뿌지직, 뿌붕—'


결코 명쾌하지 못한, 엉덩이 근육 사이로 일그러지며 터져 나오는 지독히도 리얼한 방귀 소리. 그 외국인 부인의 엉덩이에서 난 소리였다. 그 황당하고도 민망한 기류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해, 나는 발걸음에 한껏 가속도를 붙여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산성에 올라 성곽을 따라 크게 한 바퀴 휘둘러보고 싶었지만, 야속하게 흐르는 시간 탓에 제대로 된 구경은 사치였다. 결국 전체의 4분의 1 정도만 겨우 발을 들였다가 서둘러 공산성을 빠져나와야 했다. 한 가지 놀라웠던 점은 성곽 안쪽에 실제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느 유적지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라 그런지, 삶의 터전이 녹아 있는 그 모습이 유독 생경하게 다가왔다.


공산성에서 공주대까지 다시 40분 남짓을 걸어 돌아왔다. 식당 앞에서 아주머니의 일과가 끝나길 기다리며 일기를 끄적이고 있는데, 기숙사에 사는 듯한 형 두 명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본인들도 예전에 무전여행을 해본 적이 있다며 무척이나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공주를 좀 둘러봤느냐는 물음에 무령왕릉과 공산성을 다녀왔다고 답하니, 형들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럼 공주 구경은 다 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못을 박았다.


형들은 자기네 기숙사에서 재워주겠다며 솔깃한 제안을 건네기도 했지만, 이미 선약이 있었기에 정중히 사양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며, 여행자들끼리만 통하는 묘한 동질감을 뒤로하고 아주머니를 기다렸다.


마침내 아주머니께서 일을 마쳐 함께 차에 몸을 실었다. 아주머니의 보금자리에 발을 들이니 집 안은 고요하고 아늑했다. 가장 먼저 욕실로 향해 하루의 먼지를 씻어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식탁 위에는 아주머니가 정성껏 차려주신 푸짐한 저녁 성찬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맛에 감탄하며 아주머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나온 여행의 이야기, 건강에 대한 걱정, 그리고 미래의 유학 계획까지... 아주머니께서는 그 모든 이야기를 차분하게 귀담아 들어주시며 따뜻하게 보듬어 주셨다. 그 모습에서 참으로 인자한 어머니의 얼굴을 본 것만 같아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게다가 내 남루한 빨래까지 기어이 가져가 직접 빨아주시는 정성에 코끝이 찡해지기까지 했다.


밤 10시 무렵, TV 드라마를 잠깐 곁눈질하다가 이내 밀려오는 노곤함에 몸을 맡겼다. 여행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포근한 잠자리였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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