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에서 하루를 건너
새벽이 되자 어제는 느끼지 못했던 냉기가 서서히 몸으로 스며들었다. 잠결에 팔을 비비며 몇 번이나 뒤척이다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7시쯤 몸을 일으켰다. 밤사이 제대로 잠들지 못한 몸은 무겁고, 공기는 차가웠다. 아파트를 나서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씻어야겠다는 것이었고, 그보다 더 절박한 것은 소변이었다.
근처 놀이공원 안에서 화장실을 발견했다. 어제 씻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듯 정말 열심히 씻었다. 그렇게 정리를 마치고 대천해수욕장 방향으로 향했다.
어제 밤에 잠깐 보았던 바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왠지 해변에 모래가 적다라는 느낌.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해변 부근에 새로 만들어진 방파제와 구조물로 바뀐 물길, 그리고 그로 인해 사라지는 모래사장. 나는 그 변화를 실제로 보고 있다고 착각했다. 나중에야 그것이 단순한 밀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 순간의 나는 바다가 조용히 해변을 삼키고 있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었다. 안개가 얇게 깔린 해변에 혼자 앉아 있자, 쓸쓸함이 올라왔고 그 쓸쓸함은 묘한 로망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일지를 쓰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30대쯤 되어 보이는 커플이 지나갔다. 다정함이 지나칠 정도였다. 어제 받은 호떡과 선식으로 아침을 대신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는데, 잠시 후 아까 그 커플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유난히 멀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혼자 마음속으로 속삭이며 일지를 계속 이어나갔다.
일어서서 모래 해변을 따라 남쪽으로 걸었다. 해변을 따라가면 남쪽으로 계속 길이 이어질 줄 알았고 그렇게 무창포 방향으로 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해변 끝은 바위에 막혀 있었다. 바위 위로 낚시꾼들이 모여 있었고, 안개는 점점 짙어졌다. 전날부터 이어진 강행군의 여파로 다리와 발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선명한 통증을 안겨주었고, 길을 막고 있는 이 바위들이 너무 무심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고 대천 해수욕장을 벗어나 차로를 따라 무창포 방향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차로에서 차 한대가 멈춰섰고, 다시 보니 어제 나를 태워주었던 커플분들이었다. 무창포를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남은 거리를 묻자 “한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동차로 한참인 거리를 걸어가는 나에게는 얼마나 멀지 아늑하기만 했다.
길가에 차여 치여 죽은 듯한 오소리가 있었다. 차로를 따라 계속 걷다보니 이런 로드킬 당한 동물들이 종종 보인다.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그런 동물들은 보기 드문 동물들이 자주 보인다. 걷다보니 방조제가 나타났다. 유달리 높아보이는 이 방조제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잠시 의자에 앉아 다리를 쉬게 했다. 기념 삼아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카메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필름은 제멋대로 감겨 들어갔고, 고장은 분명했다.
방조제를 걷는 동안, 바다 쪽에 머물던 안개가 바람을 타고 방조제를 넘어 육지로 밀려왔다. 그 움직임은 느렸지만 분명했다. 의도하지 않았던 장면이었고, 그래서 더 인상 깊었다.
중간에 죽도와 연결된 지점에서 잠시 멈춰 일지를 쓰고 다시 길을 나섰다. 오토바이를 탄 동네 부부로 보이는 사람들이 지나가며 웃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무전여행자의 모습이 그들에게는 조금 이질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마침 썰물 때라 방조제 바다 쪽에는 물이 빠지고 해변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민분들인 듯한 사람들이 포대를 들고 굴이나 조개를 채취하기 시작했다. 재미있겠다 싶어 나도 따라 내려왔다. 처음에는 바위에 다닥다닥 붙은 조그마한 굴을 따먹었다. 간에 기별도 안 간다. 바닷물에 촉촉하게 젖어 있는 모래 위로 조그마한 집게들이 보였다. 재미난 장난감이다. 좀 넓게 둘러보니 꽤 많았다. 보이는 대로 잡아다가 한곳에 가둬두며 유치한 놀이를 했다. 간만에 불가사리도 만났다. 똑바로 누워 있길래 뒤집어 놓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새 오후 2시가 가까워졌다. 배낭을 추스르고 일어나려고 몸에 힘을 주었지만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그 자리에 누워버렸다. 내가 누운 자리는 꽤 넓고 평평한 바위였고, 눈을 찌르는 햇살도 없었다. 안개가 심하게 끼었지만 비교적 은은한 분위기였다. 한마디로 잠자기에는 딱이었다. 눈을 감고 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계속 이러고 있으면 정말 잠들어 버릴 것 같아 마음과 몸을 추슬러 다시 출발했다.
30분 걷다가 무창포가 안 나오면 차를 얻어 탈 생각이었는데, 1시간을 내리 걸어도 나오지 않는다. 자동차로도 멀다는 말을 들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막상 걸어보니 체력적으로 꽤 힘들다. 인내심을 갖고 걷다보니 드디어 무창포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발이 괴로울 정도로 피곤했다. 안개가 끼어 해수욕장 전체를 볼 수는 없었지만, 이곳에 도착했다는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시기가 지나서인지 ‘모세의 기적’이라는 바닷길은 닫혀 있었다.
해수욕장 치고는 울퉁불퉁한 바위 지대가 눈에 띄었다. 홍합과 따개비로 바위가 뒤덮여 있었고, 사람들도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나는 지금 수많은 홍합과 따개비 위에 앉아 있는 상태다.
앞에 피크닉을 하는 듯한 차림의 세 사람이 지나갔다. 바구니, 하얀색 원피스, 여자 둘과 남자 하나. 그런데 자리 깔고 준비하는 모습이 피크닉은 아니었다. 여자가 20대처럼 보였는데, 여자 두 명 중 한 명이 무당인 듯 보였다. 슬슬 물이 들어오는 시간인데도 자리를 뜰 기색이 없었다. 주위에서 조개를 캐던 사람들은 이미 빠져나갔는데, 그들은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에 갇히지는 않을지 불안했다. 결국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 채, 시간이 늦어 해수욕장을 벗어났다.
무창포에서 나올 때 웅천까지 가시는 아저씨의 봉고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웅천에서 내려 보령 방향 도로에 앉아 일지를 쓰고 있는데, 보령으로 가는 무쏘가 멈춰 서며 태워 주었다. 아저씨는 내가 대단하다고 하셨다. 보령에 도착해 도서관 앞에서 내려, 도서관에서 6시까지 컴퓨터를 했다. 직원 아주머니께 근처에 성당이 있는지 물어보니 두 군데가 있다며 약도를 그려 주시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현대아파트 뒤에 있는 성당에 도착했지만, 신부님께서 교육을 가셔서 직원이 한 분밖에 없어 어렵다는 답을 들었다. 난방이 안 된다는 이유, 직원이 한 명뿐이라는 이유였다. 대신 대천초교 옆 성당을 추천받았다. 시설이 더 좋다고 했다.
얼마쯤 걸리냐고 물으니 5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30분쯤 걸렸다.
성당에 도착하니 아주머니 여섯 분과 수녀님 한 분이 성모상 앞에서 묵주기도를 하고 계셨다. 기도 중간에 끼어들 수 없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기도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기도가 끝난 뒤 수녀님께 사정을 말씀드렸지만, 이곳은 사람을 재워 주는 곳이 아니라는 답을 들었다. 신부님이 계시면 모르겠지만,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다고 했다. 아마 이 동네 신부님들께서 단체로 연수를 가신 듯했다.
갈 곳이 없어 방황하다가 사우나를 발견했다. 24시간 하는 곳이면 하루를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가까운 사우나에 들어가 영업시간을 물어보니 샤워는 가능하다고 했다. 근처 24시간 사우나를 물어보니 아래쪽으로 내려가라고 했다. 커다란 간판에 ‘24시간 사우나’라는 글씨가 보였다. 목욕은 4,000원, 찜질은 6,000원이라고 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만 하고 나왔다.
이제는 아파트 옥상에서라도 자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교회 십자가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교회로 들어갔다. 목사님께 사정을 말씀드리자 난감해하시다가, 차에서라도 괜찮으면 자라고 하셨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잠시 후 다시 나오셔서 교회 안 작은 방을 내어 주셨다.
방에 배낭을 풀고 씻는 동안, 위층에서 성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성가를 듣다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부님이나 목사님들은 대체로 노래를 잘하시는구나...
방으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는데, 다시 위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독교식 기도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얼른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