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이 없어서인지 약간 서늘한 기운이 돌았지만, 아파트 옥상에서 노숙하는 것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 9시쯤 일어나 한 시간 반 동안 여러 탕을 전전하며 느긋하게 목욕을 즐겼다. 마침 최희섭 선수의 메이저리그 경기가 중계되고 있길래 잠시 TV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곳은 목욕탕과 찜질방이 같이 있는 곳이라, 챙겨온 'GO'라는 소설책 를 들고 찜질방으로 내려갔다. 책을 절반 정도 읽다 보니 조금 지루해져서 다시 수면실로 들어가 두 시간가량 낮잠을 청했다. 한숨 자고 밖으로 나오니 아주머니 세 분은 달걀을 까 드시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어린 여자아이가 만화 영화를 보고 있었다. 아마 디지몬이었던 것 같다.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아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화면 속 만화만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채널을 돌려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시청했다. 그러자 아까 그 아이가 슬그머니 내 옆으로 오더니 바닥을 뒹굴며 같이 TV를 보기 시작했다. 코너 하나가 끝나자 아이는 나지막하게 "끝났다"라고 말하더니, 찜질방에서 나온 아주머니들이 이름을 부르자 이내 일행을 따라 가버렸다.
다시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MBC 뉴스까지 챙겨 봤다. 뉴스가 끝나자 요리 프로그램이 이어졌는데, 라오스라는 나라의 음식을 소개하고 있었다. 특히 화면 가득 꼬치구이가 등장했을 때는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어제 누나에게 얻은 초코바 하나로 하루를 꼬박 버티고 있는 처지였으니 말이다. 뒤이어 '대자연의 경고'라는 프로그램까지 보고 나니, 하루 종일 TV 앞에만 붙어 있는 내 모습이 참 지루하게 느껴졌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목욕탕으로 올라갔다. 하루 종일 먹은 게 거의 없어서인지, 문득 눈앞의 시야가 흐릿하게 번져갔다.
멍하니 TV를 보다 지도를 펼쳤다. 앞으로의 일정을 정리할 겸, 구두 닦는 형님에게 이곳이 광주의 정확히 어디쯤인지 물었더니 지도 위 대략적인 위치를 짚어주셨다. 계속되는 TV 시청도 슬슬 질려갈 무렵, 다시 몸을 씻으러 욕탕에 들어갔다.
탕 안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청년 한 명이 있었는데, 연신 주변 눈치를 살피더니 자기 뱃살을 꽉 움켜쥐고는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그러더니 냉탕으로 옮겨가 수중 안마를 받으며 야릇한 포즈를 취했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 다시 TV 앞에 자리를 잡았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인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방영되고 있었다. 여행 중이라 매회 챙겨 볼 수는 없지만,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면 반가운 마음이 든다.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더 지체하지 않고 수면실로 들어가 깊은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