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핑계가 된 하루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빗소리가 멈출 기미가 없어, 결국 하루 더 사감님과 머물게 되었다. 계획이 틀어졌다는 아쉬움보다, 이상하게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래, 오늘은 쉬어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핑계가 자연스럽게 붙었다.
오전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이것저것 시간을 보냈다.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화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뭔가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어느새 점심 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내려갔다. 밥을 먹고 난 뒤, 설거지를 하고 계시던 식당 아주머니를 도와 접시를 나르며 잠깐 손을 보탰다. 여행자 신분으로 얻어먹기만 하는 게 괜히 마음에 걸렸다. 아주머니는 “괜찮다”며 웃으셨지만, 그 짧은 설거지 시간이 왠지 하루 중 가장 제대로 된 노동처럼 느껴졌다.
점심 이후에는 다시 TV 앞에 앉았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이상하게도 다 재미가 없었다. 결국 책이나 좀 보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책은 펼치지도 못했다. 침대에 앉는 순간, 눈이 스르르 감겼다. ‘잠깐만 눈 붙이자’는 생각이,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깊은 잠으로 바뀌었다.
눈을 뜬 건 저녁 무렵이었다. 사감님께서 “밥 먹으러 가자”고 깨우셨다. 낮잠이라고 하기엔 너무 진지하게 자버린 얼굴로, 멍한 상태로 식당으로 내려갔다. 저녁을 먹고 나니, 또다시 TV 앞. 이번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 차려 보니 또 졸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의 하루는 이렇게 흘러갔다.
걷지도 않았고, 특별한 사건도 없었다. 대신 먹고, 보고, 자고, 또 자고. 무전여행 중이 맞나 싶을 만큼, 지나치게 평화로운 하루였다. 하지만 몸은 분명 지쳐 있었고, 이 무력한 하루조차도 어쩌면 다음 길을 위한 예열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일은 정말 다시 걷게 될 거라고, 반쯤은 다짐처럼, 반쯤은 자기암시처럼 그렇게 생각하며 또 하루를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