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본다는 것에 대하여

애정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를

by 도토리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며, 보게 되면 간직하게 되나니, 그것은 단순히 쌓아두는 것이 아니다.


조선 시대 문장가 유한준의 이 글귀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 내 삶으로 들어왔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문장으로 변주되어 회자되던 그 말은, 오랫동안 내 마음 한 귀퉁이에 접혀 있던 나침반이었다. 이제 열 살이 된 아이와 겨울 여행을 준비하며, 나는 해진 책장을 다시 들춰본다.


모두가 말리는 사학과에 진학한 것도, 가족 여행 일정표에 늘 낡은 유적지가 빠지지 않는 것도 이 문장들의 영향이 컸다. 좁은 땅덩어리 아래 수천 년의 시간이 층층이 쌓인 나라. 우리나라를 여행한다는 건 결국 발바닥 아래 묻힌 억겁의 시간을 걷는 일이라는 걸 나는 그 책을 통해 배웠다.


대학 시절의 봄과 가을은 늘 흙먼지와 함께였다. 매년 백 명이 넘는 학생이 같은 땅을 향해 답사를 떠났다. 우리는 그 땅의 속살을 들여다보기 위해 몇 주 밤을 새워 발제문을 쓰고 답사책을 만들었다. 유적지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가던 순간들. 전날 밤의 숙취로 영혼은 보내버리고 몸만 남은 선배도 있었고, 교수님의 엄격한 뒷모습 뒤로 짐짓 진지한 표정을 연기하던 묘한 공기도 있었다.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발굴 현장에서 이름 모를 옛사람을 위해 묵념을 올리고, 땅속에서 막 고개를 내민 작은 파편 앞에서 숨을 죽이던 경이로운 찰나 속에도 나는 존재했다.


그때 깨달았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을. 애정을 담아 들여다보는 대상은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이와 여행을 갈 때면 그때의 습관이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하지만 관심 없는 아이를 붙잡고 긴 설명을 늘어놓는 것이 얼마나 무력한 일인지 안다. 그래서 조금 느리고 은밀한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여행 일주일 전, 가야 할 곳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슬그머니 아이의 책상 위에 둔다. 워터파크와 맛집 사이 슬쩍 서원 하나, 절 하나를 끼워 넣는다. 아이가 묻지 않으면 설명하지 않고, 아이가 무심코 지나치면 나도 그저 따라 걷는다.


지금 당장 알지 못해도 괜찮다. 다만 그저 스쳐 지나가지만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나태주 시인의 구절처럼, 사람도 풍경도 삶의 이야기들도 모두 그러하다는 것을 아이가 스스로 느끼길 기다린다. 서둘러 판단하면 영영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고, 조금 더 머물러야 비로소 수줍게 드러나는 얼굴들이 있기 마련이다.


세상은 한 번 보고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많은 다정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지금은 시시해 보이는 돌 하나, 낡은 건물 하나도 오래 보고, 알고, 마음을 주면 전혀 다른 우주로 다가온다. 굳이 역사를 사랑하지 않아도, 유적지가 지루해도 상관없다. 다만 아이가 세상을 대할 때 조금은 천천히, 조금은 오래 바라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한다.


그렇게 보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타인의 마음도, 그리고 자기 자신의 깊은 속마음까지도.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그 따뜻한 눈을 가질 수 있는 틈을 열어주는 것뿐이다. 그 눈으로 발견할 나머지 세상은 오롯이 아이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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