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정답과 나의 서성임 사이에서
열 살에 가까워질수록 아이의 문장은 뼈가 굵어진다. 제법 사람다운 논리를 갖추고 내 앞에 설 때면, 나는 속수무책으로 말문이 막히곤 한다.
어제 아이는 수영을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동네 시립 수영장의 좁은 문을 뚫지 못해 찾아간 사설 어린이 수영장. 주 2회 32만 원이라는 버거운 수업료를 감당하기 위해, 아이는 밤 9시의 찬 공기를 가르며 물속으로 들어갔다. 20%의 할인이 수반된 그 '마지막 타임' 덕분에, 아홉 살 아이는 일 년 가까이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젖은 머리로 잠자리에 들었다.
아이도 알았을 것이다. 엄마 아빠의 주머니 사정이 녹록지 않음을. 3학년이 되기 전에 꼭 영어학원을 보내달라는 약속 하나를 부표 삼아, 아이는 그 고단한 밤의 수영을 견뎌왔을 테다. 그런 아이가 어제, 아주 이성적인 마침표를 찍었다.
"엄마, 나 이제 접영까지 할 줄 알잖아. 학원비도 너무 비싸고. 운동을 하나 해야한다면, 차라리 그 돈으로 복싱이나 검도를 배워서 체력을 키우는 게 낫지 않을까?"
맞는 말이었고 합리적인 말이었다. 마땅히 옳은 말이었음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반박할 논리가 없었다. 수영을 못 하는 내게 아이의 영법은 이미 생존의 경계를 넘어선 기술이었고, 그 돈을 아끼면 산더미 같은 대출 이자를 갚거나 아이가 원하는 새로운 학원에 등록해 줄 수도 있었다. 아이의 문장은 오차 없는 정답이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이, 목구멍이 체한 듯 뻐근했다. 그 묵직한 이물감의 정체를 헤치고 들어가 보니, 그 끝엔 결국 나의 오래된 미련이 고여 있었다.
실력이라는 건 매끄러운 사선의 그래프가 아니라, 투박한 계단의 모양으로 자라난다. 재미를 붙이며 빠르게 오르던 실력은 이내 끝도 없는 평지에 갇히고 만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막막한 정체기 앞에서 성취감은 증발하고, 재미는 낡은 수경의 필름처럼 희미해진다. 대개 포기는 그 평평한 길 위에서 일어난다. 바로 다음 계단이 코앞인데도 발바닥에 닿는 평지의 안락함에 속아, 우리는 되돌아 내려오고 만다.
"이쯤 하면 됐지" 하며 멈춰 선 곳이 영원히 머물 자리라고 착각하며, 쉼표여야 할 자리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어버리는 것이다.
나의 생이 그러했다. 정상의 공기를 들이마시기보다 효율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안주라는 가면을 쓰고 적당한 지점에서 가방을 쌌다. 내가 두고 온 수많은 '다음 계단'들이 아이의 발밑에서 일렁이는 것을 보았을 때, 내 안의 감정은 이성을 앞질러 출렁이기 시작했다. 아이의 정답을 무너뜨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정답 너머의 풍경을 한 번만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네 말이 다 맞아. 그런데 엄마는 네가 틀려서가 아니라 조금 '아까워서' 머뭇거리게 돼. 실력이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지금은 완만한 평지에 닿은 거거든. 계단 하나만 더 올라가면 보이는 풍경이 있는데 그걸 못 보고 내려오는 게 아쉬워. 물론 그 위에서 어떤 일이 기다릴지는 엄마도 몰라. 하지만 네 마음이 지금보다 훨씬 단단해져 있을 거라는 건 확신해."
단순히 영법이나 기술을 다 가르치지 못한 아쉬움이 아니다. 아이가 무엇을 배우든, 정체기라는 끈적한 평지를 뚫고 다음 계단으로 발을 내디딜 때의 그 감각을 전해주고 싶었다.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생의 문법'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아이에게서 '끝까지 해내지 못했던 나'의 그림자를 발견할까 봐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결정' 대신 '체험'이라는 완충지대를 제안하며 투박한 진심을 보냈다.
"엄마는 네가 잘해온 게 아까워. 하지만 이건 엄마의 마음이니 엄마가 다스릴게. 결정은 네가 하되, 딱 6개월만 '깊이 파보는 경험'을 너 자신에게 선물해 보면 어떨까? 치열하게 부딪혀보고 그래도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그땐 엄마도 미련 없이 네 결정을 따를게."
엄마로서 욕심을 부리자면, 아이의 인생에 '끝까지 밀고나가서 성취해내는, 한 분야를 깊이 파본 경험' 하나쯤은 남겨주고 싶다.
공들여 쌓아 올린 아이의 서사가 너무 일찍 닫힐까 봐, 나는 아이의 정답 앞에서 여전히 비겁하고 애틋하다. 지나간 것에 대한 아쉬움도 다 아이의 몫인데, 그 감정까지 짊어지려는 내가 어리석기도 하다.
무언가를 그만둔다고 할 때마다 언제나 아쉬운 쪽은 나였다. 하지만 그 아쉬움의 진짜 이름은 사랑이었다고, 아이의 서사가 나보다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깊게 뻗어 나가길 바라는 이 지독한 투사조차 부모라는 이름의 간절함이었다고, 훗날의 아이가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