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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무경 Apr 29. 2024

영영전(英英傳)

한국의 고전 연정 이야기


영영전(英英傳) 

  선조 대왕 시절 성균관 진사에 김생이라는 소년 선비가 있었는데 얼굴이 뛰어나게 아름답고 풍채가 좋았다. 글을 잘하고 우스운 이야기도 잘하는 것이 참으로 그 당시 풍류랑이었다. 나이 겨우 15세에 진사 제일과에 올라 그 이름이 장안에 유명하여 이름 있는 집안에서 서로 딸을 주려고 원했다.


하루는 김생이 성균관에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봄 향기에 취해 술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어느덧 저녁 해는 서산에 걸리고 날던 새들은 숲으로 돌아가니 김생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말에 올랐다. 사람의 그림자가 뜸한 길을 가면서 그는 시를 지었다.


동쪽 언덕의 꽃과 버들을 감상하니

말도 발을 멈추고 가지를 않는구나.

어느 곳에 옥 같은 미인이 있느뇨.

복숭아꽃 덧없으나 정이사 한 있으랴


바로 그때 그의 눈앞에 한 미인이 나타났다. 나이는 열여덟 정도 되었는데, 고운 이와 밝은 얼굴은 진실로 국색이었다. 김생은 그 여인을 보느라 말을 달리지 못 하고 있었다. 그때 그 여인도 김생이 어떤 뜻을 가지고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부끄러움을 머금고 눈썹을 나직이 하고는 감히 쳐다보지를 못 하였다. 그 여인이 멀리 간 후에 김생이 뒤따라가 본즉 상사 동 길옆에 있는 두어 칸 정도의 조그마한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김생은 그날부터 상사병을 앓기 시작했다. 자도 잠자리가 편치 않고 때가 되어도 밥이 목을 내려가지 않았고 몸은 점점 말라 시든 나무와 같았다. 그렇게 십여 일이 지나갔다. 보다 못한 노복 하나가 그 까닭을 물으니 김생이 마지못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노복이 한 꾀를 생각해 내었는데, 잔칫상을 차려 그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 집의 방을 빌려 손님 대접을 한다고 했다가 손님이 오지 못할 것 같으니 미안하다고 하면서 집주인에게 방을 빌려주어 고맙다고 선물을 주면 고마운 마음에 그 여인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김생은 그 말대로 술과 안주를 가지고 그 집을 찾았다. 방을 빌려 마침내 그 집주인인 한 노파와 마주 앉게 되었다. 그리고는 계획대로 노파에게 비단 적삼을 선물했다. 기뻐하는 노파에게 김생은 일전에 만난 여인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노파는 그 여인이 죽은 형의 딸로, 이름이 영영이고 지금 회산군 댁 시녀로 있다고 알려 주었다. 본래 글을 잘하고 마음이 부드러워 회산군이 첩을 삼으려고 하는 참이라는 이야기도 하며, 노파는 둘을 만나게 해 주고 싶지만 어렵겠다고 말했다.


실망하는 김생을 보고 노파는 "오월 단오 때 회산군 부인께 청해서 영아에게 하루 여가를 달라고 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위로하였다. 그때부터 김생은 일각이 여삼추로 단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단오 날이 되었다. 김생은 노파의 집으로 달려갔다. 영영 낭자가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데, 얼마 후 창 밖에 조용히 신을 끄는 소리가 났다. 바로 영영 낭자였다. 그때 영영은 뜰에 매여 있는 누군가의 말을 보고 이상히 여겨 쉽게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노파의 재촉으로 집안으로 들어온 영영은 김생과 마주 앉게 되었다.


노파가 차려온 술상을 마주하고 세 사람은 함께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한 노파는 방으로 들어가고 영영과 단둘이 된 김생은 그녀에게 함께 밤을 보낼 것을 원했다. 그러나 영영은 김생의 마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훗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김생은 영영을 끌어안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정욕을 고무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영영이 약속한 훗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약속한 날이 되어 김생은 영영이 일러준 대로 궁궐 한쪽의 무너진 담을 찾아 들어갔다. 잠시 후에 마중 나온 영영의 모습을 보니 김생의 마음은 한없이 뛰었다. 이윽고 두 남녀는 조용한 방을 찾아들어 서로 베개를 가까이하고 못내 그리웠던 정을 서로 나누었다. 야속한 시간은 어느덧 흘러 곧 새벽이 찾아왔다.


"좋은 밤은 이다지도 짧고 우리의 사랑은 무궁한데, 장차 올 이별을 어찌 하며, 한번 궁문을 나가고 나면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기가 어려우니 이 심정을 어찌 하리요?" 김생의 말에 영영도 흐느껴 울며 이별을 슬퍼했다. "도련님께서는 이별한 후로 저를 가슴에 두지 마시고, 학업에 열중하시어 꼭 벼슬길에 오르소서." 두 사람은 이별과 사랑의 시를 지어 주고받았다.


김생은 집으로 돌아와 넋을 잃고 마음을 잃어,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들을 수 없는 나날을 보냈다. 편지라도 한 장 쓰고 싶었지만 상사 동의 노파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보낼 길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세월은 흘러 김생은 다시 글공부에 마음을 쏟고 있다가 과거를 보게 되었다. 김생은 출중한 실력으로 마침내 장원급제하고 유가를 떠났다. 그 당당한 행렬을 보고 사람들은 칭찬이 자자하였다. 


마침 유가 행렬이 회산군 댁에 이르렀다. 김생은 문득 옛일이 생각나서 마음속으로 남몰래 기뻐했다. 그리고는 일부러 취한 체하고 말에서 떨어진 다음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때 이미 회산군은 돌아가고 삼 년 상도 지난 뒤였다. 부인은 쓰러진 김생을 방안에 눕게 하고 그가 정신을 차린 다음 차를 대접하도록 했다. 그때 차를 들고 나온 궁녀가 바로 영영이었다.


두 사람은 실로 오랜만에 마주 앉았지만 서로 눈으로만 말할 뿐이었다. 김생이 안타까운 마음에 안절부절 못 하고 있을 때 영영이 찻잔을 들고 일어서면서 슬쩍 편지를 떨어뜨렸다. 


김생은 얼른 그것을 주워 소매 속에 감추고 나왔다. 말에 올라 집으로 돌아와 뜯어보니 그 동안 영영이 자신을 잊지 못하고 또한 그의 입신을 기원하고 있었던 사연이 구구절절이 씌어 있었다. 편지를 읽고 난 김생은 다시금 병이 나고 말았다.


얼굴이 파리해지고 몸이 쇠약해져서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러기를 두어 달, 김생의 친구인 이정자가 병문안을 왔다. 자초지종을 묻는 친구에게 김생은 그간의 일을 이야기했고 정자는 위로하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말게나. 회산군의 부인은 나에게 고모가 되는 분으로 의리가 있고 인정이 많은 분이라네. 또한 회산군이 돌아가신 후로 그 마음이 더욱 너그러워져서 가산과 보화를 아끼지 않고 희사하시며 그 너그러움을 보여주고 계시니 내가 자네를 위해서 애써 보겠네." 김생은 기뻐하며 친구에게 거듭 부탁의 말을 하였다.


그날 정자는 부인을 찾아가 말했다. "모월 모일에 장원급제한 사람이 취하여 문 앞을 지나다가 말에서 떨어져 정신을 차리지 못해 고모님이 차를 대접한 일이 있으십니까?" "있네." "그 사람은 김생이라는 바로 저의 친구로 사람됨이 훌륭하여 장차 크게 될 인물이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상사병이 들어 문을 닫고 누워서 지낸 지 벌써 두어 달이 되었다 합니다. 제가 알아본즉 영영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고모님께서는 영영으로 하여금 김생을 따르도록 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부인은 다 듣고 나서 "내 어찌 영영을 아낀다고 한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도록 하겠느냐?" 라며 바로 영영을 김생의 집으로 보내 주었다. 영영을 만난 김생은 기운을 차려 다시 깨어나고 마침내 기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김생은 공명을 영원히 사양하고 평생 다른 여자를 취하지 않고 영영과 함께 해로했다고 한다.        


[출처] 영영전(英英傳)|작성자 참대 charmdae

[한국 문예위원회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6166&cid=41708&categoryId=4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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