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냉정하게 대한 뉘우침이 더욱 새로워져 사과하는 마음으로
내가 집안이 넉넉지 못해 고등학교 진학을 못하고 시골집에서 땔나무나 하면서 지내던 때의 일이다.
개울 건너에 초등학교가 세워져 인근 어린이들이 모여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시골에도 인구가 많아서 시골 학교임에도 학생이 제법 많았다.
내가 사는 동네 윗마을에 사는 중학교 동기생이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이 학교에 부임해 왔기에 나는 창피함도 모르고 스스럼 없이 그 학교에 가서 학생들과 놀았다.
나는 중학교에 다닐 때 그림을 잘 그려 동창생들이 “너는 서라벌 대학교에 진학해라.”고 말해 주었는데 나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당시엔 서라벌 대학교가 미대의 전형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며 그 정도로 나름 그림에 솜씨가 있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진학도 못할 정도로 어려운 우리 집 사정으로 대학교가 가당키나 한 일인가?
어쨌든 당시에 나는 만화가를 지망해 혼자라도 집에서 만화를 그리고 있던 때였으므로 백지나 모조지 전지를 접고 또 접어 16절지 정도가 되면 이 종이와 연필을 들고 학교로 가서 주로 어린 여학생들의 모습을 스케치하거나 크로키 했다. 그러다 보니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 가운데에 우리 동제에서 얼마 떨어져 있는 고개 바로 아랫동네에 사는 여학생 하나도 그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절세의 미녀였다. 특히 그녀의 머리가 상고머리(?) 스타일이었는데 상큼하게 느껴지고 더 사랑스러워 보였다. 아니 다른 머리 스타일이라고 싫어 보였을까?
내가 지금까지 80여 년을 살아오면서도 그런 미인을 직접 대명해 본 것은 한쪽 손가락으로 다꼽을 수 있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학교 교사들도 그 소녀의 미모를 극찬하며 서울의 어떤 유명 여배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입을 모아 말할 정도였고 그와 동창생인 내 외사촌 동생 민아도 귀엽고 예쁜 편인데 뒤에 엽서보다 조금 큰 그들의 졸업 사진을 보니까 내 외사춘 동생은 어디에 서 있는지 찾기 어려웠지만 그녀의 미모는 사진에서도 환히 빛나게 보여 바로 찾을 수 있었다.
남자가 어여쁜 미녀를 좋아하는 것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은 고래의 본성이 아닌가? 나도 명색이 남자인데 이런 미소녀를 싫어할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교사가 되어 부임한 동창보다는 그녀를 만나는 즐거움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거의 매일 거르지 않고 학교에 가서 주로 그녀를 화폭에 담았다.
그렇게 하기를 몇 년이 지나 그녀가 학교를 졸업하자 나 역시 학교에 가서 그림 그리는 짓을 그만 두게 되었다. 그 후로 그녀를 다시 만나기도 어렵고 볼 일도 없이 여러 해가 지났다.
그 뒤로 내 생각도 많이 바뀌어 이상하게 결혼이 싫어지고 여자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특이한 성향이 되었는데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세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우리 마당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저 혹시 여기에 민아 오지 않았어요?”
하고 묻는다.
민아가 여기에 올 이유가 있는가? 외가댁은 여기서 1km도 더 떨어진 곳에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집에 올 까닭도 없는데 왠 민아?
나는 오랜만에 그녀를 보고도 반갑다는 말도, 마루에 올라오란 소리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의도를 몰라 멀뚱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되돌아갔고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뒤에 나는 10리 길이 넘는 면사무소 소재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곳을 가려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는 고개 동네 옆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 동네가 바로 그녀가 사는 동네였다. 그날은 면 소재지에 5일 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내가 그녀의 동네 옆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그녀가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시장을 가려고 나섰다가 우연치 앉게 나와 시간과 장소가 일치했었던 것 같다.
그녀는 내 걸음에 떨어지지 않을 모양으로 종종걸음을 치면서 따라붙어 오는데 나는 아무런 감흥도 없이 무정을 넘어 냉정한 마음으로 앞서 걸었다.
그렇게 거의 2km도 넘게 같이 걸으면서도 거의 말이 없다가 나는 시장에 거의 가까운 곳에 이르러 아무 말 없이 그녀와 떨어져 길가 동네 친척집으로 가는 옆길로 향했다.
그 뒤로 그녀와 다시는 만나지 못했고 소문에 따르면 그녀는 그 뒤에 인천의 어느 동네로 시집을 갔다고 한다.
지금도 나는 그때 내가 왜 그렇게 나를 좋아했던 절세 메녀를 그토록 쌀쌀하게 대했던 것인지 내 마음을 알 수 없다. 결혼과 여성을 부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내가 이제야 깨달은 것은 그녀가 갑자기 우리 집 마당에 나타나 민아가 왔느냐고 물었던 일과 시장 가는 길에 거의 2km가 넘는 길을 종종거리며 따라온 것이 나를 속으로 좋아해서였을 거라는 점과 처녀가 그토록 연심을 품기에는 오랫 동안의 고민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토록 고민했을 터인 그녀에게 그렇게 무정하게 대해 깊은 상처를 준 겄이 아니었을까 하는 마음에 이제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 할 정도로 너무 미안하여 자주 뉘우치며 날을 보낸다.
그녀에게 크게 사과하는 의미로 이 글을 쓴다. 이제 80이 가까웠을 그녀가 살아서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면 부디 너그러히 생각해 주기를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