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부흥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일본 지식인, 그런데 한국은?
개척정신, 탐구정신, 도전정신, 천착의 힘이 남달랐던 인물…단순한 언어 번역 아닌 선진문명에 대한 철저한 해부와 모방
사람들은 대부분 언어의 기원에 대해 무감각하다. 그 시원(始原)에 대한 고민 없이 모국어인 양 사용한다.
미국산 ‘baseball’이 야큐(野球)가 됐다가 어떻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포츠 ‘야구’가 됐을까? 야구라는 단어는 어원 출처가 분명하다. 일본의 교육자 주만 가나에(中馬庚, 1870~1932)는 ‘baseball’을 야큐(野球)로 번역했다. 베이스를 설치하고 공으로 하는 놀이는 들판에서 벌이는 전쟁 같은 스포츠가 된다. “숏스톱은 전열(戰列)에서 대기하고 움직이는 ‘유군(遊軍)’으로 보는 듯하다”는 설명으로 遊擊手(유격수)라는 명칭도 만들어냈다. 그는 1970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회한다.
근대 조선은 서양의 발명품을 일본의 번역을 통해 그대로 삼켰다. 스스로 고민은 없었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조선을 도와주러 오는 ‘유격대’는 없었다. 조선이란 베이스는 텅 비어 있었다.
서양은 세계를 발견했다. 그들은 도전했다. 호기심과 모험으로 드넓은 대양을 건넜다. 도전의 크기가 근대의 세계 권력을 재편했다. 중국이 아편전쟁 등 서양과의 싸움에서 힘을 빼는 사이 위기감을 절감한 일본의 발걸음은 재빨라졌다.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商館)에서 부분적으로만 세계와 소통하던 일본은 적극적으로 서양 배우기에 나선다. 견수사·견당사·조선통신사·견구사절단 등 선진문물을 수용했던 일본은 젊고 유능한 인재를 서구에 파견하기에 이른다. 그 첫 번째 나라는 네덜란드다. 난학(蘭學)의 전통을 유지하던 일본이 선택할 수 있었던 최적의 서구 국가였다.
동인도회사라는 독특한 체제를 운영했던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를 거점으로 일본 나가사키까지 아시아로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서구문명과 문물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일본의 근대화 초기 스승이 되기에 이른다.
중국산 새 한자어와의 경쟁에서 승리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국력을 하나로 모았다. 그리고 변신을 시도한다. 동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를 따라잡으려는 놀라운 몸부림이 시작된다. 부국강병과 서양 문화 따라잡기이다. 1870년경에 이르면 이러한 움직임이 절정을 이룬다. 서양 각지로 유학을 떠났던 인물들이 귀국해 서양을 번역하기 시작한다.
번역은 단순히 언어의 번역이 아닌 선진문명에 대한 철저한 해부와 모방이었다. 동서양이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권에 살고 있었기에 동양에는 없는 개념들을 번역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동아시아에서는 가장 선두에 서서 이 일을 맡은 나라가 일본이다.
중국도 번역에 나섰으나 언어 감각이나 국제감각에서 일본에 밀렸다. 같은 단어를 한자로 번역해도 일본에서 만든 번역어가 생존율이 더 높았다. 일본은 번역을 통해 서양의 선진문명을 일찌감치 수용하고 변신을 시도해 동아시아의 최강자 반열에 오른다.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에 편입해야 한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론을 주장하며 일본 근대화의 틀을 제공한 이끈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그는 서양의 ‘democracy’라는 개념을 두고 처음에는 ‘하극상(下剋上)’으로 번역했다가 나중에 민주(民主)로 바꿨다고 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시빌라이제이션(civilization)을 문명으로, 라이트(right)는 권리로, 소사이어티(society)는 사회로 번역했다. 복식부기·보험 등의 번역도 그의 작품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어’ 한자는 대부분 서양(그리스) 언어 번역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철학·예술·사회·문화·문명·자유·권리·개인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개념어들이 한자로 번역됐다. 거기에는 서구 문명의 한가운데로 유학을 가서 견문을 넓히고 돌아온 메이지(明治) 시대의 언어와 지식 천재들의 역할이 컸다. 분야별로 일본의 근대어 번역을 일별(一別)해 보자.
메이지 이후 근대어의 번역에는 세 가지 방법이 사용됐다. 첫째 17세기 이후 중국에 온 선교사가 번역한 한역양서(漢譯洋書)와 영화사전(英華事典)에 인용된 한자 단어다. 둘째 18세기 일본의 난학자들이 네덜란드 서적을 번역하면서 창안한 한자 단어다. 셋째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인이 서양 서적을 번역하면서 만든 한자 단어다.
중국 문학자인 다카시마 토시오(高島俊男)는 막부 말기까지 일본제(製) 한자어와 에도 막부 말기 이후 일본제 한자어를 비교하고 그 차이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에도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샤미센(三味線: 일본 전통 현악기) 등은 귀로 들으면 의미가 명확했다. 반면 메이지 이후에 조어된 단어, 가령 심리는 심리(心理)와 심리(審理)가 혼동된다. 개념어의 번역이 시작되면서 일본제 한자어가 본격 등장한다. 동아시아에 없는 새로운 개념의 명명식(命名式)을 일본이 시작한 것이다.
일본제 한자어는 근대 이후 중국에 역수출된 것도 적지 않다. 중국이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특히 청일·러일전쟁 전후 중국인 유학생에 의해 일본어 서적이 많이 번역된다. 중국어로 된 일본식 한자어의 예로 ‘의식’ ‘우익’ ‘운동’ ‘계급’ ‘공산주의’ ‘공화국’ ‘좌익’ ‘실연’ ‘진화’ ‘키스(接吻)’ ‘유물론’ 등이 있다.
중국에서도 스스로 서양어 번역을 시도하고, 중국산 새 한자어를 만들어내는 등 일본제 한자어와 경쟁한다. 그런데 동아시아에 없던 개념을 번역하는 분야에서는 일본식 한자가 최종 승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economy’를 중국에서는 엄복(嚴復, 1854~1927)이라는 사람이 생계학(生計學)으로, 일본에서는 경제(經濟)로 번역한다. 한자 문화권은 후자를 선택한다.
1720년 막부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금서령(禁書令)을 완화한다. 이때부터 한역양서가 일본에 전해지게 된다. 중국에 진출한 서양 가톨릭 선교사들이 영화사전을 편찬한다. 조금 늦게 중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들도 한역양서를 발간한다. 대표적인 서적이 만국공법(萬國公法)이다. 영화사전과 만국공법의 학습으로 신조된 많은 한자가 일본에 수입된다. 국채(國債)·특권(特權)·민주(民主)·야만(野蠻) 등을 꼽을 수 있다.
서양 단어를 한자로 만든 학술단체 메이로쿠샤
난학자들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대표적인 서적이 스기타 겐파쿠(衫田玄白, 1733~1817)의 [해체신서(解體新書)]다. 스기타 겐파쿠는 신경·연골·동맥·정맥 등의 번역을 통해 서양 의학을 받아들였다. 자연과학이나 기술 분야의 번역은 주로 난학을 통한 결과였다.
다음으로는 서양 유학생 출신들이 주동한 신문명 결사체라 할 수 있는 단체의 움직임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서양의 단어를 한자로 만들어 기여한 곳은 메이로쿠샤였다. 메이로쿠샤는 메이지 시대 초기에 설립된 일본 최초의 근대적 계몽 학술단체다.
1873년(메이지 6년) 7월 미국에서 귀국한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정치가·외교관, 히토쓰바시대학 창립, 1847~1902)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교육자·저술가, 게이오주쿠 창립, 1835~1886),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교육가·관료, 1836~1916),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 교육자, 1832~1891), 니시 아마네(西周: 사상가, 1829~1897), 니시무라 시게키(西村茂樹: 계몽사상가·관료, 1828~1902), 쓰다마미치(津田真道: 관료·계몽사상가, 1829~1903), 미쓰쿠리슈헤이(箕作秋坪: 교육가, 1826~1886), 스기 코지(杉亨二: 계몽사상가·관료), 미쓰쿠리 린쇼(箕作麟祥: 법학자·교육자, 1846~1897))등과 함께 그해 가을에 계몽 활동을 목적으로 결성했다.
단체 명칭은 메이지 6년 결성으로부터 유래한다. 모임은 매달 초하루와 16일에 열렸다. 회원은 구 막부 관료, 가이세이쇼(開成所) 관계자들,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문하생 등 ‘관민조화’로 구성됐다. 학자들뿐만 아니라 구 다이묘, 정토진종 혼간지 세력과 일본 은행·신문사, 가쓰 가이슈(勝海舟) 등 옛 사족(士族)이 뒤섞인 쟁쟁한 멤버가 참여한 것이다.
모리 아리노리는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인재 육성이 급선무이며, 국민 개개인이 지적(知的)으로 향상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양에서 견문을 통해 익힌 ‘학회’라는 것을 일본에서 처음 창단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27세이던 후쿠자와 유키치를 회장으로 추대했으나, 그가 고사하자 모리 아리노리가 초대 회장에 취임한다.
최초 정원은 앞서 열거한 10명이었다. 회원은 ‘정원’ ‘통신원’ ‘명예원’ ‘규격 외원’으로 나뉘었다. 그해 4월 11일에는 [메이로쿠잣시](明六雑誌) 첫 호를 발행했고, 게재 논문 수는 156편에 이르렀다. 모두 메이지 초기의 시대정신을 담은 논고였다.
발행 부수는 월 평균 3200부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의 최대 발행 부수 신문인 [도쿄니치니치신치문(東京日日新聞)]의 부수가 8000부였다고 하니 지식인들을 독자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듬해인 메이지 8년 9월 이 잡지의 휴간이 결정되는데, 회원 대부분은 문부성 직할의 도쿄학사원 제국 학사원으로 바뀌었다.
하급 무사·서민 등 하층 출신의 맹활약
메이로쿠샤의 핵심이 된 동인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니시무라 외에는 하급 무사 혹은 서민과 같은 하층 출신자였다. 이어 메이지 시대 이전부터 양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막부의 학문기관인 가이세이쇼(開成所) 등에 고용돼 있었다.
회원 대부분이 에도 막부 말기 또는 메이지 시대에 양행(洋行) 경험이 있었던 만큼 존왕양이(尊皇攘夷) 사상에 물들지 않았다. 또 후쿠자와를 제외하면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관리로 정부에 출사한 것도 특징이다. 인습과 고정관념의 속박이 덜하고 새로운 지식을 함유할 수 있는 개방적 심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도 특징이다. 서양 문물을 오랑캐의 더러운 물건 취급하며 기득권 수호에 급급하던 조선 대부분의 사대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처럼 서양 사정에 밝은 지식인들이 계몽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정례 연설회와 잡지 발행이었다.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정례 연설회에서 개별 테마에 대해 의견 교환하고, 이를 바탕으로 필기한 것을 [메이로쿠잣시]에 게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지식의 전달은 잡지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연설회에서 ‘연설’이라는 단어는 후쿠자와가 ‘speech’를 번역한 것이다. 또 연설회가 열린 곳은 양식(洋式) 취향이 강한 쓰키지(築地)의 세이요켄(精養軒)이었다.
메이로쿠샤가 결성된 지 몇 개월 후 잡지가 간행됐다. 잡지에는 계몽이라는 큰 목표는 있었지만, 세세한 편집 방침은 없었고, 전호(全號)를 일관하는 구체적인 주제도 없었다. [메이로쿠잣시]는 특정의 의견을 드러내기보다는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고 지식을 소개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종합 학술지를 목표로 한 만큼 취급 범위는 매우 폭넓었다. 의회 설립 문제, 학자들의 자세, 처첩의 시비(남녀 동권론 등), 철학·종교 등 종교론, 문자 개량론 등 교육론, 사형 폐지론 등 사회 문제, 화폐, 무역 등 각종 경제 문제 등에 걸친 논설과 번역을 다루고 있다. 다만 문학에 관해서만은 논설이 적다. 니시 아마네가 [지설](知說)(제25호)에서 문학 용어를 소개하는 정도였다.
게재 논설의 총수는 156개. 그 내역을 많은 순서대로 늘어놓으면 쓰다 마미치 29개, 니시 아마에 25개, 사카타소 20개, 스기 코지 13개, 모리 아리노리와 니시무라 시게키, 나카무라 마사나오가 동렬로 11개, 가토 히로유키가 10개, 간다 코헤이가 9개, 미쓰쿠리린쇼 5개, 가시와바라 타카아키 4개, 후쿠자와 유키치 3개, 시미즈 우사부로 2개, 미쓰쿠리 슈헤이와 쓰다센, 시바타 마사요시가 각각 1개 순이었다.
햇수로 2년 만에 정간(停刊)한 [메이로쿠잣시]였지만 그 여파는 대단했다. 정례 연설회 개최와 함께 그를 토대로 한 학술 잡지 발행이라는 계도 스타일도 선구적이었다. 이들이 시도한 작은 날갯짓은 서양의 개념을 한자로 번역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펼치는 데 공헌했다. 여기서 동서양을 아우르며 활약한 인물이 바로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다.
그는 일본 최초로 공식적으로 서양에 유학을 간 인물이다. 1862~1865년 막부의 명으로 네덜란드에서 유학했다. 그는 법학·칸트·경제학·국제법을 공부했다. 친목 결사인 프리메이슨에 처음으로 가입한 아시아인이다. 현재 그 문서가 라이덴 대학에 남아 있다고 한다. 예술·이성·과학·기술·철학 등 한자 번역어의 ‘저작권자’다.
니시 아마네는 일본 근대의 중요한 계몽사상가이자 철학자이며 최초로 서양철학과 사회과학을 계통적으로 일본에 소개한 학자다. 그런 이유로 ‘근대 일본 철학의 아버지’ ‘일본 근대 문화의 건설자’라고 불린다.
한자 문화권에서 서양 근대 철학의 번역어를 조어(造語) 하려면 동양 전통 철학과 서양철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이 필요했다. 니시 아마네는 풍부한 문화적 소양과 지식을 갖고 있었다.
니시 아마네는 어릴 적부터 조부의 지도를 받아 글씨를 배웠다. 네 살 때 [효경]을 읽고 여섯 살에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읽었다. 열두 살부터 번(藩)의 학교에 들어가 한학(漢學)을 공부하며 [주역] [상서] [시경] [춘추] [예기] [근사록] 등을 열독했다.
니시 아마네는 이렇게 학습하던 시절을 회상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가족의 교훈을 받고 선생님들의 지도를 받아 성현의 도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니시 아마네는 [이정전서(二程全書)]와 [정몽(正蒙)] [주자류어(朱子語類)] 등의 책을 반복적으로 읽고 “몇 년간 그것을 읽고 엄격하게 따랐다. 게다가 그 도리는 옳은 것이어서 첨삭할 수도 없었다.”고 감탄했다.
이러한 동양철학에 대한 이해와 서구의 유학 경험을 통해 가장 이상적인 번역어 찾기 몰두한다. 영어의 ‘reason’을 이성으로 번역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유학 기간에 쓴 [가이다이몬(開題門)]에서 “송대의 유학과 이성주의는 말투에는 차이가 있지만 내용은 비슷하다.”고 밝혔다.
육구연(陸九淵)은 ‘반관(反觀)’을 강조하면서 인간은 밖에서 찾지 않아도 되며 자신의 마음을 ‘반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수인(王守仁)은 ‘치양지’[致良知: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천리(良知)를 지극히 다한다(致)는 뜻]를 주창하고, ‘격물치지(格物致知)’는 자기 마음을 응시하는 내성(內省)으로 해석했다.
니시 아마네는 중국의 철학 사상에 대해서 서양철학의 이성주의자, 예를 들면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같은 대륙 이성들은 감성 인지만으로 사물을 인식할 수 없으며 반드시 수학 추리의 방법으로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니시아마네의 ‘이성’이란 신조어는 서양 이성주의에 입각한 송·명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스물한 살부터 3년간 니시 아마네는 오사카 마쓰카게주쿠(松陰塾), 오카야마학교(岡山学校)에서 유학(儒學)을 공부했다. 졸업 후 그는 닌바이다치주쿠(任培達塾)의 학장을 맡았다. 1853년 7월 니시 아마네는 에도 신바시 제후의 저택에서 유교적 해석과 설교를 맡았다.
초기에는 가정 계도, 학교 교육, 후에는 유교 교관의 경력을 통해서 니시 아마네는 선진(先秦)에서 송·명 시대까지 대량의 저작을 읽고 한학의 기초를 쌓았다. 그러다 1862년 막부의 명령으로 네덜란드로 유학을 갔다. 법학을 공부하며, 콩트의 실증주의 철학이나 밀의 공리주의 철학을 섭렵하고 자연과학의 진화론 등도 공부했다.
1865년(게이오 원년)에 귀국한 니시 아마네는 대정봉환(1867년 일본 에도 바쿠후가 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준 사건) 무렵 15대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정치 고문을 맡았고, 1868년(게이오 4년) 막부의 누마즈 사관학교 초대 교장에 취임했다. 1870년(메이지 3년)에는 메이지 정부의 병부성에 들어갔으며 이후 문부성·궁내성 등의 관료를 역임했다. 그는 ‘군인칙유(軍人勅諭)’를 작성하는 등 군제의 정비와 그 정신의 확립에 기여했다. 군인칙유는 일본 군국주의의 정점에 있는 국민교육헌장 같은 군인의 복무규율이다. 공포된 것은 1882년(메이지 15년)이었다.
니시 아마네는 동시대에 활약한 후쿠자와 유키치와 종종 비교된다. 메이지 유신 후의 문화사를 말할 때 그는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지만 후쿠자와 유키치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래서 니시 아마네를 ‘어용학자’로 간주하고 과소평가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철학·과학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한 공적으로 일본 내에서 니시아마네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불편하다. 니시 아마네는 존황 주의자로 일본 군국주의 군인정신을 기초한 사람이다. 니시 아마네는 그의 사후에 펼쳐지는 침략전쟁 때 군인정신의 토대를 만든 인물이고,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적 각성을 통해 야만 국가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시대의 흐름을 타고 자신들보다 뛰어난 문명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도전한 사람들은 약소한 민족에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 초기 일본 문학사에서 ‘근대 지식인의 고뇌’를 소설로 쓴 모리 오가이(森鴎外, 1862~1922)는 니시 아마네 사후인 1898년(메이지 31년) [니시 아마에전(西周傳)]을 쓴다. 두 사람은 고향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모리 오가이 역시 훌륭한 번역가이기도 했다. 모리 오가이는 군인 신분으로 독일 유학을 다녀와서 동아시아 최초로 괴테의 [파우스트] 번역을 한다. ‘아우어바흐 켈러’라고 하는 레스토랑에 걸린 괴테 파우스트의 명장면이 20장 정도 있다고 한다. 그중 한 그림은 파우스트가 아닌 모리 오가이의 초상화다.
일본의 근대 번역어에 기여한 인물을 통해 개척정신, 탐구 정신, 도전정신, 천착의 힘 등을 느낄 수 있다. 하나같이 열린 마음과 함께 성숙한 기다림이 필요한 것들이다. 대한민국이 한류라는 문화현상을 만들게 된 근본 원인 중 하나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대한 직수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남의 눈이 아닌 스스로의 고민과 성찰이 있었다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문화 식민지로 남이 만들어 건네준 번역어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일 것인가. 근대의 번역에서 일본은 적극적인 역할을 했고, 중국은 일본과 경쟁했으나 보편성 획득에 실패했다. 조선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무임승차의 길을 택하더니 자유를 잃어버린 혹독한 세월을 경험했다.
우리에게는 반관의 이성적 기다림과 성찰이 필요하다. 성찰하지 않는 민족에 미래는 신기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최치현-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 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 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 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