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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무경 Apr 06. 2024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2] [나]와 [남]은 무엇인가?

어디까지가 [나(자기)]이고 어디까지가 [남(타인)]인가?

[2] 이기심과 이타심의 기준인 나와 남의 준별(峻別)


나와 남의 뜻

나 이외의 사람은 누구이거나를 묻지 않고 모두 남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 이외의 사람에게 이롭게 하면 모두 이타인가?

만약에 이 말이 맞다면 이 세상의 의지자들은 모두 남일 것이며 따라서 이로운 행위라면 모두 이타적인 행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굳이 [이타 ⸺곧 남을 이롭게] 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대상을 가리키는 “남”이나 대상을 목적격으로 부르는 “남을”이라는 옥상가옥의 표현을 쓸 까닭이 없고 그냥 “이로운 행위”라 하면 될 것이다.     

이기심과 이타심이라는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논의의 핵심은 나와 남에서 [남]이 과연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이로움의 대상이 되는 나(己: 나)와 남{타(他): 다른 사람}이란 무엇인가가 뚜렷하게 밝혀져야 한다. 곧 이기ㆍ이타의 기준인 나와 남의 개념이 명료하게 확립되어야 한다.

●이기ㆍ이타의 핵심적 조건으로서의 의지의 성격 판단 확립. 이기ㆍ이타는 결과에 따라서가 아니라 의지로부터의 인과(因果), 곧 의지가 동기의 필연에서 형성되었는가? 결과에 따라서 판단된 것인가를 확정해야 한다. 동기에서 형성된 개념만이 이기ㆍ이타를 가름하는 참된 기준이다. 

     

또한 

●이기ㆍ이타가 개체 자신의 동기에 따라서만 판단될 것이 아니라 그 동기가 피행자[대상]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도 고려되어야 한다. 결과가 피행자에게 이롭다고 하여 이타라고 할 수는 없다. 또한 결과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이타적인 동기가 없다면 이타심이 아니다. 이롭지 않은 결과가 맺어졌다면 당연히 이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특히 이타심의 경우. 남에 대한 이타심이 같은 조건의 대상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느냐? 대상에 따라 달라지느냐? 또 대상에 관한 조건이 달라지면 지향되는 이타의 내용도 달라지느냐가 중요하다. 내용이 대상에 따라 이유 없이 달라진다면 이타심은 의심될 수밖에 없다. 


     

[]의 두 가지 의미로서의 소아(小我)와 대아(大我) 


이기나 이타의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필수적인 논의의 핵심 요소는 이로움의 대상이 되는 나(己: 나)와 남(他: 다른 사람)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이타심이 개념이 되려면 이롭게 하려는 대상으로서의 남[타(他)]의 개념 속에 나[자기(自己)]의 의미가 섞여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겉보기에 남을 이롭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나의 이익을 위한다면 그것은 이타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기심이라는 개념에서 볼 때 이기심의 주체인 나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것은 나의 개념 안에 드는 주체가 심신의 두 분야에 다 같이 나타나기 때문에 [나]만으로 한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신체적으로 더 분리시킬 수 없는 생명 최후의 개체인 자기 자신을 [소아[小我]라 부르고 신체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지만, 마음으로는 나의 동류의식에 의해 나라고 의식되는 모든 범위의 의지자들인 [우리]와 우리의 협동 동아리인 [우리끼리], 곧 [대아(大我)]로 구분할 필요가 생긴다.  

    

소아[小我]: 신체적으로 더 나눌 수 없는 생명 최후의 개체인 자기 자신.

대아[大我우리]: 신체적으로는 나뉘어 있지만, 나의 의식에 의해 나로 의식되는 모든 범위{테두리}의 의지자들. 


*여기서의 소아나 대아 개념은 불교에서의 소아 ∙ 대아 개념과는 전혀 다름.


이에 견주어 나의 테두리인 소아와 대아의 범위에 들지 않는 모든 의지적 존재는 [남]이 된다.      

[] : 나와 다른 의지적 존재. 나와 다르다는 것은 무엇인가? 소아와 대아의 범위에 들지 않는 모든 의지자.      

이기심과 이타심에 관해 초들 때 나 밖의 사람은 누구이거나를 묻지 않고 모두 남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 이외의 사람에게 이롭게 하면 모두 이타라고 해도 괜찮은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와 남의 구별 근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나]란 무엇인가? 

나의 테두리는 어디까지인가?     


생각해 보면 [나]란 내 몸과 마음의 역할{〘지 ∙ 정 ∙ 의〙}이 영향이 미치는 범위. 내 의식과 의지 및 감성이 미치는 범위 안에 드는 것. 내 소유물, 내 의지의 지배를 받는 것. 자기의 의지를 밝히거나 말없이[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 나에게 맡겼음이 확실한 것 등이다.      

내 신체는 그 작동 ∙ 그 감각 ∙ 그 움직임 모두가 내 안에 있지 않더라도 적어도 내 감각이나 의지 아래에 딸려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내 것이다.


내 의지가 제어(制御)할 수 있는 범위 안의 소유물 ∙ 내 반려동물 ∙ 내 식구 ∙ 내 팀원 등도 제어할 수 있는 범위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함부로 나라고 주장할 수 없다.     

나의 자아가 다만 나라고 의식하지만, 그 대상에게 자아가 따로 있어서 그 자아가 나를 동류로 인정해 주지 않으면 그 대상은 내가 아니다. 예컨대 자녀는 내가 낳고 그의 행불행이 나의 행불행이라고 생각되는 “운명의 공동체” 더 가까이는 “일심동체”라 부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의 자아가 따로 있어 나를 그들 자신이라고 여기지 않으면 아무리 유전자 근연도가 50~75%가 같은 자녀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우리]일 수는 있어도 [나]일 수 없다.     

 

다 함께 똑같은 정신의 기능들을 공유하여 같다는 의식을 지니고 서로의 의지 범위에 드는 내 신체 밖의 남들이지만 대아의 테두리에 드는 의지자는 [우리]이다.      

다만 우리라고 의식되는 내 아내나 남편 ∙ 내 정치적, 또는 기업체의 후계자도 역시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대상의 자아가 [우리]임을 거부하면 그 대상은 우리가 아니다.  

    

나와 남을 준별하기 위한 실마리

준별의 기준


나와 남은 무엇을 기준으로 준별해야 하는가?

우리는 분명히 남과는 다른 자기, 곧 자아(나)라는 개념을 형성하여 이를 통해 자기를 남과 구별하려 하는데 이때 자기와 남을 구분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나와 남을 구별하기 위한 여러 개념이 있을 수 있지만 필자는 여기에서 다음의 세 가지 징표에만 주목하려 한다.   

   

✻개체의 [신체]

✻[유전자]

✻[의식]  

   

혹시 그 밖에 나와 남을 구별할 수 있는 개념이나 요소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현재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나는 개체의 [신체]인가?


일반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나와 남을 구별하는 근거는 신체일 것이다. 생물 개체, 곧 생명체는 예를 들어 질병에 걸리거나 상처를 입었을 때 통증을 느끼는 것은 어느 경우에라도 [나]라는 개체의 신체이지 나의 유전적 근연자나 그 밖의 다른 개체인 [남]의 신체가 되는 일은 없다. 

     

가벼운 쾌락이든 심각한 고통이든 이 감정을 겪는 것은 오롯이 개체 당자의 신체일 뿐이다. 아무런 남도 나의 신체를 대신하지 못한다. 나와 남을 가르는 것은 신체적 개체라는 이러한 국한된 한계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어머니[나]가 자녀[남]에게 보여주는 모성애는 진화심리학적으로 이타적 현상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의문은 어째서 [남]과 [나]의 구분지가 신체를 기준으로 설정된 [개체]냐 하는 것이다.  

   


유전자인가?


유전자 관점의 전형은 생물학자 특히 진화론자와 진화 심리학자들에게 있다. 진화심리학적으로 말한다면 나와 남을 준별하는 기준은 분명히 유전자일 것이다. 유전자의 지식이 없던 시대의 한자문화권에서는 [혈연(血緣)]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사실 유전자는 혈[血(피)]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정확히는 정자와 난자의 결합이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친족 이타주의를 주장하면서 그것이 유전자 근연도(近緣度)가 친족 간의 이타성을 결정하는 지표라고 생각한다. [남]이라는 개념의 한계를 오로지 [유전자]에 국한시키고 이러한 전제에서 나 이외의 존재들에 대해 이로움을 주는 행동을 이타심이라고 정의한다.

      

문자대로라면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에서 아들은 내가 어머니는 아니니까 남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고 아껴 보살펴 아들에게 용돈을 주거나 점심을 사 주는 등의 이로움을 주는 것이 이타심일 수 있다. 누군가가 물에 빠져 생명을 잃을 위험에 빠졌을 때 이타적 태도[실은 남을 도와주는 행동]를 보여 그를 구하려 하는 것은 포괄 적합도를 포함한 유전자 근연도에 따른다.      


진화심리학적으로 말한다면 나와 남을 준별하는 기준은 분명히 유전자일 것이다.

      

[데이비드 버스의 친족 확인 가능성]

진화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버스는 친족 확인 기제는 꼭 필요한 적응{누가 좋은 동맹이 될지, 누구를 믿어도 될지, 섹스를 해서는 안 될 사람이 누구인지, 필요할 때 누구를 도와야 할지를 비롯해 많은 종류의 행동이 이} 기제에 의존해 이루어진다고 지적하고 친족을 확인할 수 있는 최소한의 4가지 방법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데이비드 버스 지음 ❰진화심리학❱ 웅진 지식하우스 이충호 옮김 2014. 4. 7. 383쪽     


⑴유대를 통해. 

⑵냄새를 통해. 

⑶세 가지 인지적 구성요소의 보편문법이 만들어 낸 친족 분류를 통해. ⑷얼굴의 유사성이나 표현형의 유사성을 통해.      

사람들은 또한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친족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차례대로 검토해 보자.   

  

유대를 통해: 유대를 통해 친족 여부를 알아보는 일이 명확하게 가능한가? 유대의 강도에 의해 그들이 말하는 [호혜적 이타심]의 대상자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이타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사람을 잘 점검해 보면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유대의 강도는 친족임을 확인한 뒤의 일이다. 강한 유대감을 갖기 전에 친족 여부를 알아낼 가능성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다.  

   

냄새를 통해: 강아지라면 몰라도 우리 인간이 냄새를 통해 친족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은 믿어지지 않는다.      

세 가지 인지적 구성요소의 보편문법이 만들어낸 친족 분류를 통해: [계보 상의 거리] [사회적 지위] [집단 소속감] 등     


얼굴의 유사성이나 표현형의 유사성을 통해: 사람들은 또한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친족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 이는 의식을 통한 인지이다.   

   

필자는 ⑷의 의견만은 지지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외적 특징 ―키가 훤칠하다거나 성격이 거칠어 보인다거나 얼굴이 잘 생겼다거나― 을 바로 알아볼 수 있고 그의 표정을 거의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유력한 기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나와 유전자가 같은가 다른가는 물론 그의 유전자와 내 유전자가 어느 정도의 근연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내는 직관[혈연인식(血緣認識: kin recognition)]이나 기제는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과연 사람들에게 얼굴의 유사성이나 표현형의 유사성을 통해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친족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을까? 백보 양보해서 만약에 매우 미심쩍은 주장이기는 하지만 저 방법으로 친족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4)번을 뺀 나머지 3가지 방법은 의식의 개입으로 가능한 방법이다.      

곧 친족 확인(진화론에서는 유전자의 확인이라는 과학적 방법을 취할 수 있다.)은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의식에 의한 것이다.     


같은 형태를 지닌 유인원 종, 또는 영장류 종 가운데에 속한 개체들을 낱낱이 구별해 내는 데에는 안목이 매우 정밀하고 예민한 사람이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 낱낱이 나와 어떤 유전적 근연도를 지니고 있는지를 직각적이고 뚜렷하게 구별해 낼 수는 결코 없다. 

     

사람들은 형태의 비슷한 정도를 보고 남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대개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극히 정밀하고 예민한 사람이라도 모르는 사람들의 부모 자식을 구별할 수는 없다.      

웬만한 사람들은 신문을 통해서 들어보았을 프랑스판 낳은 정 기른 정*의 사례에 따르면 9년이 지났는데도 친자녀 여부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여러분들 가운데 ”어떻게 9년씩이나 자기 자식을 못알아 봤느냐?“고 힐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 사례의 주인공들은 9년 ―아니 9년이 아니라 90년이 지나도⸺ 사태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오랫동안 헤어져 있는 사람들의 친족 여부를 정보 없이 데이비드의 확인 방법만으로 정확히 구별한다는 것은 ―현대 유전자 생물학에 의한 DNA 검사를 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영화나 연극에서의 부모 자식에 배역된 배우들

우리는 수많은 매체를 통해 [연극]과 [영화]를 시청한다. 이들 장르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많은 배우들의 배역에 의해 연기된다. 부모나 자녀들의 배역은 유전자의 근연도가 서로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서로 유전적으로 매우 다를 뿐만 아니라 성격이나 모습 행동들도 닮은 점이 거의 없다.     

만약에 부모 형제 배역을 실제 자녀와 그 형제들로 맡긴 드라마와 전혀 다른 사람들로 짜여진 드라마 배역을 비밀리에 방영하고 시청자들에게 어느 배역이 남이며 어느 배역이 가족들에게 맡긴 배역인가를 물어보면 어떨가? 가족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을까?      


바꿔 말해 데이비드 버스의 ”⑷얼굴의 유사성이나 표현형의 유사성을 통해라는 명제의 타당성이 증명되는가를 묻는 것이다. 필자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곧 부정적이라고 본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을 친족으로 오인하여 많은 투자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을까? 그럴 가능성이 없다면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친족 이타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동류라는 의식“에 의한 것임에 틀림없다.      

남을 친족으로 여기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든 오인이든 간에─ 의식에 의한 것이지 본능에 의한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제프리 밀러는 그의 저서인❰연애{메이팅 마인드}❱에서 혈연 이타주의가 주장하는 유전자의 근연도는 사람과 원숭이, 심지어 사람과 식물 사이에도 커다란 동일성이 있으므로 혈친과 비슷한 정도[상사도(相似度)]의 유전자 근친도는 그다지 중시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제프리 밀러 지음 ❰연애{메이팅 마인드}❱김영주 옮김 동녘 사이언스 2012. 5. 5   

   


의식인가


심리학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나와 남을 구별하는 요소는 데이비스 버드도 위의 ⑷항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의식이다. 인간[모든 생명체]의 구분은 물리적 생리적 개체보다는 의식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개체를 떠나서 내가 나라고 여기는 의식의 한계 안의 모든 개체는 결코 남이 아닌, 나의 개념 범주에 넣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곧 우리가 나 남의 구별뿐만 아니라 같은 [나]의 동류 가운데에서 대아(大我: 우리들)나 소아(小我: 나) 등 동류 여부를 구별하는 일은 의식을 기준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의식에 반영되는 나 또는 나의 동류―의부모(義父母)나 의형제를 맺거나 끊는 것[의절(義絶)] 모두 의식에 따른다. 의식은 나와 남을 구분할 수 있는 결정적 요소이다. 

     

[나]라는 의식은 “나와 같다.”는 의식과 다르지 않다. 나와 같다는 의식은 대상의 생김새, 대상의 사유 방식, 서로 간의 생존이나 사고의 일체성 ⸺공동의 운명체ㆍ공통의 신뢰성⸺ 등의 일치 등에서 생긴다.

      

대개 객관적인 유전적 동일성과도 크게 일치하기는 하지만 결코 완벽한 일치를 이루는 일이 없을 수 있다[있을 수 없다]. 동의의 수준에서는 일치가 오히려 적대적일 수도 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플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나와 남을 구별하는 것은 단적으로 나의 의식이다. 나와 사촌, 나와 육촌의 친소 관계가 단순한 유전적 관계만으로 형성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혹이 있을 수 있다. 의식이 나 남의 구별 근거라 하더라도 나의 근연도의 테[동심원]를 형성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무엇이 나와 사촌, 나와 육촌의 친소 관계의 의식을 형성하는가? 나와 동류의 친소 관계를 형성하는 요소는 역시 유전자적 이기심이거나 친밀감이 아닌가? 이 역시 유전자적 요소 아닌가?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했다시피 나와 남을 구별하는 것은 단적으로 나의 의식이다. 나와 사촌, 나와 육촌의 친소 관계가 단순한 유전적 관계만으로 형성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객관적으로 유전자의 일치도가 50% 이상인 대상 ⸺부모나 형제⸺ 이라도 내가 이를 “내가 아니라 남이라고 의식”하면 그때의 그 대상에 대한 나의 태도는 [나]라는 의식이 지향되는 대상과는 상당한 차이를 드러낼 것이다.      


의식에 반영되는 나 또는 나의 동류들 예컨대 의부모(義父母) 형제ㆍ의절(義絶) 등은 모두 의식에 따라 나와 남이 결정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요소이다.      

위에서 유전자에 의한 나와 남의 구별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했듯이 유전자 근연도 여부를 알려주는 것은 오로지 정보이며 정보는 의식에 의해서만 인지될 수 있다.   

   

이러한 정보 없이는 심지어 아버지나 어머니, 자식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조차도 거의 불가능하다. 그들에 대한 축적된 경험적 정보 의식에 의존하지 않고 그 외적 형태, 또는 냄새 등만으로는 결코 유전자의 근연도를 알아낼 수가 없다. 


성 선택을 비롯한 자연선택에서 자기 복제와 전파를 거의 유일의 [목적]으로 삼고 용의주도한 생리적ㆍ심리적 기제를 작동하게 하는 유전자가 그토록 중요한 친족의 근연도 파악에는 왜 이처럼 무기력한가 하는 점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근연도에 의해 나 남을 구별하는 것은 유전자나 개체, 또는 다른 무엇인가에 앞서 그 대상에 대한 의식이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나]와 [남]을 유전자나 개체로 구분하려 한다면 의식에 의한 남이 실제[곧 물질적]로 남이 아닐 수도 있으며 대상이 가짜일 수도 있다. 이 경우에 문제점.

     

✼남을 사랑한다거나 이롭게 한다고 할 때 모든 남을 사랑하거나 이롭게 하는가? 아니면 거기에도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 차이는 무엇을 기준으로 구별하게 되는가? 

아마도 이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믿는다.    

                     

나와 남 구별 근거 요소의 비교표

[제남]과 [온남]


이타심의 적용 대상 ⸺곧 대상인 나와 남⸺ 을 좀 더 확실하게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기에 필자는 이기심으로 여겨야 할 관계자들과 이기심과는 동떨어진 관계자들을 구별하기 위한 근본적인 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제남]과 [온남]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쓰려고 한다.   

   

[제남신체상으로나 유전자상 남이기는 하지만 〘긍효로움〙상 나와 관계가 깊은 사람들.


여기에서 관계란 다음과 같은 경우를 가리킨다. 

♣보상 관계: 앙갚음이나 안갚음을 하는 관계

♣친분 관계: 서로 이미 알고 지내어 친분이 깊은 긍효 관계 

♣이해 관계: 서로 이해를 주고받는 사이     


[온남] 알고 지내더라도 나와의 긍효 관계가 전혀 없는 온전히 남인 사람들.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제남이겠는가 온남이겠는가? 거대한 이권을 얻기 위해 뇌물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관계를 온남 관계라 할 수 있는가? 없는가? 아직은 아니지만, 뒷날 또는 먼 날 이익을 주고받을 것이 예상되는 사이의 사람들은 제남인가? 온남인가? 


결론적으로 “진정한 이타심”이란 관계인이 제남으로 맺어져 있지 않은, 순전히 [온남]에게 베풀어지는 경우만이 해당된다.      


자기애와 이기심: 자기애는 본능에서 일어나며 이기적이다. 이타심은 이성(理性)의 양심에서 일어나므로 이기적인 자기애가 아니다. 양심의 긍정 감으로써의 떳떳함이나 당당함은 이기적인 감정이 아니다.      

진화심리학은 문화는 물론 도덕까지도 진화론, 유전자 이론 등에 의해 훌륭하게 설명된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설명할 수 있는 도덕적 개념으로 이타심를 꼽는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친족 이타심]을 주장하면서 그것이 유전자 근연도에 따르는 친족 간의 도움을 결정하는 지표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물에 빠져 생명을 잃을 위험에 빠졌을 때 이타적 태도를 보여 그를 구하려 하는 것은 포괄 적합도를 포함한 유전자 근연도에 따른다.     

필자는 이타심이 도덕적 개념이기 위해서는 이롭게 하려는 대상으로서의 남[타(他)]의 개념 속에 나[자기(自己)]의 의미가 섞여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겉보기에 남을 이롭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대상이 실은 [제남]이어서 결과적으로 나의 이익을 위하는 일이었다면 그것은 이타일 수 없다.    

 

이기와 이타의 기준결론은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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