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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무경 Apr 15. 2024

존 스튜어트 밀과 해리엣 테일러의 사랑

지성인들의 사랑법

존 스튜어트 밀과 해리엣 테일러의 사랑

[출처: 위키백과/ 스파르타쿠스 기타 문서를 참조 및 인용하여 재구성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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❶밀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나이에 공리주의 사상과 정치경제학, 논리학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할 수 있었으나, 20대에 들어서면서 흥미와 의욕이 감퇴하는 등 정신 건강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스물한 살 때에 그는 극심한 신경 쇠약에 시달렸는데,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의 시와 마르몽텔(Jean-François Marmontel, 1723~1799)의 작품 등에서 위안을 얻었다.      


특히 스물네 살 때인 1830년, 해리엣 테일러(Harriet Taylor Mill, 1807~1858)를 만나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정신적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해리엇 테일러는 한 런던 외과의사인 토마스 하디와 그의 아내인 해리엇 허스트의 딸로 1807년 10월 8일에 태어났다. 18세 때 그녀는 Islington에서 온 한 부유한 사업가인 존 테일러(John Taylor)와 결혼했다. 몇 년 뒤 해리엇은 세 자녀들을 두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자유주의적인 유니테리언 교회에서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 활동을 하였으며, 급진적인 정치사상을 지니고 여성의 참정권 운동 등을 벌였다. 그들은 여성의 권리들을 일찍부터 지지한 유니테리언의 지도적 성직자인 윌리엄 폭스와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해리엇 테일러는 급진적 서클들로 옮겨갔고, 1830년에 그녀는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을 만났다.      


테일러는 한 사람의 동료로서 그녀를 대우해준 최초의 사람인 밀에게 끌렸다. 밀은 테일러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자신이 최근에 쓴 저서들에 대하여 읽고 논평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수년 뒤 해리엇 테일러와 존 스튜어트 밀은 결혼과 여성의 권리들이라는 주제들로 쓴 에세이들을 교환했다. 이 에세이들에는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밀의 주장보다 더 급진적 관점들을 지지한 테일러의 주장이 더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   


밀은 해리엣 테일러와 21년 동안 지적인 교류를 지속하면서 순수한 우정을 쌓았다. 


해리엇 테일러의 남편과의 관계는 나빠지기 시작했고, 1833년에 그는 별거를 위한 재판에 동의했다. 해리엇은 존 스튜어트 밀이 주말마다 그녀를 방문했던 곳인 Walton-on-Thames에 있는 한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해리엇 테일러와 밀이 하나의 성적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고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친구들에게 추문이 되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다. 

    

당시 이들의 삼각관계는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화제였지만 당사자 세 사람의 이성적 행동으로 추문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다.  

   

존 테일러는 1849년 5월 3일에 암으로 죽었다. 테일러와의 사이에는 헬렌 테일러 등 3명의 자녀를 두었다.      

남편을 잃고 혼자된 해리엣 테일러와 밀은 2년여를 근신한 뒤에, 그리고 밀은 21년 동안의 교제 끝에 1851년 그녀와 결혼했다.      


해리엣은 명석한 여성으로, 밀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자유론(On Liberty)>과 <여성의 예속(The Subjection of Women)>(1969) 등은 해리엣 테일러의 직접적 영향으로 저술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밀이 해리엣과 친분을 쌓으면서,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이 더욱 강해졌다. 


『자유론』은 그녀가 죽은 직후에 출간되었는데, 그녀의 영향 아래 많은 수정이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여성의 예속』에서도 해리엣의 영향은 암시적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그녀는 저서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것을 아주 꺼려했다.      


해리엣은 밀과 결혼한 지 겨우 7년이 지난 1858년, 밀이 동인도회사에서 사직하고 모처럼 자유롭게 둘이서 프랑스를 여행하던 도중에 아비뇽(Avignon)에서 결핵으로 인한 폐출혈로 사망함으로써 밀은 큰 비탄에 빠진다. 밀은 "아주 행복했고 짧았던 칠년 반“이었다고 회상했으며 해리엣을 그곳에 묻고, 조그만 집을 사서 여생의 안식처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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