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
<너무나 많은 여름이>라는 책은 저자가 낭독회에서 독자와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을 엮어 만든 단편 소설집이다. 발제자는 그런 정보를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많고 많은 베스트셀러 가운데 제목이 맘에 들어 선택했다. 역시나 이 책을 읽은 멤버들은 왜 이 책을 고른 것인지에 대한 이유를 궁금해했지만, 말 그대로 어떤 이유가 있진 않았다. (다만, 발제 기간 전에 미리 읽었다면 책은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발제자 입장에서 굉장히 어려웠던 책이었다. 읽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무튼, 그래서(?) 역대급으로 적은 인원(발제자 포함 3명)만이 함께 했다. 단 3명의 모임이었으나, 이야기는 풍성했던 '너무나 많은 여름이' 모임이었다.
선_ 읽으면서 엔드류 포터 '사라진 것들'과 비슷하단 느낌을 받았다. 중간중간 읽으면서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지만 공감이 전혀 안 되는 부분도 많았다. 그렇지만 중간에 한 작품이 정말 맘에 들었다. 첨에 읽을 땐 이 작품이 단편집인 줄 몰랐다. 그냥 약간 여름에 관한 어떤 에피소드들을 모은 이야기로 신나고 재미있을 줄 알고 시작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낭독해용이라 그래가지고 육성으로 읽으면 좀 다르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청춘들의 방황을 그린 작품은 취향이 아니다.
광_ 나는 반대로 이 저자가 쓴 '청춘의 문장들'이란 산문집을 좋아했다. 20대 때 가장 좋아했던 산문 중에 하나였고 그래서 이 작가의 초기 작품들을 꽤 많이 읽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 분도 이제 나이가 들었네 하는 느낌을 받았을 때부터 안 읽고 멀리했다. 그러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아무래도 낭독이라는 기준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다양한 내용의 작품들이 있어서, 새로 발견하게 돼서 좋았던 점도 있었다.
은_ 저는 굉장히 읽기 어려웠다. 이전 책이었던 '비올레트, 묘지지기'를 처음 읽었을 때도 읽기 어려워서 힘들어했다가 막판엔 너무나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어서 이 책도 처음엔 어려워도 읽다 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면서 읽었는데 계속 보다 보니까 이 문장에 익숙해졌다고 해야 하나, 익숙해진 후엔 좀 내용이 받아들여지기 했지만, 그전까진 정말 읽기 힘든 책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의 성향이 나랑 너무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외1) 청춘들의 방황을 그린 작품이란 얘기를 나눴을 때, 요즘 세대의 젊은 작가들과 추천 작품들도 언급되었다. 청춘들의 이야기를 잘 담아내는 작가로는 장유진, 정세랑 작가를 추천하며 작품으로는 쇼코의 미소와, 특히 밝은 밤이 엄청 좋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반기 발제책으로 밝은 밤이란 책으로 정해야 할까 하는 고민도 했다. ㅎ)
번외2) 이 책의 문장이 어려웠다. 익숙하지 않았다는 말에 '광'은 이렇게 말했다. 언론에서 요즘 애들이 문해력이 떨어졌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 그저 한자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이고 영어의 영향력이 더 커진 거다. 요즘 애들은 영어식 한국 표현을 더 잘 이해한다. 우리 때도 그랬다. 어른들한테 왜 이런 단어를 모르니?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 그에 '선'은 단어도 단어지만 이 책은 문장 자체가 이해가 잘 안 됐다. 연결? 맥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지 한참 생각하면서 읽게 되는 책이다. 이게 뭔가 장르를 딱 못 정해서 그런 것 같다고 했으며 '광'은 그것을 거장병이라 불렀다. (거장병이란, 간결하고 명확하게 쓰는 걸 피하고 열린 결말과 모호한 해석과 여기에 인생을 담으려고 하는, 그래서 이 작가가 늙었단 생각을 했다고 하였다)
은_ <거기 까만 부분에>라는 작품이 너무 좋았다. 울컥 포인트도 있으면서, 유일하게 이해되는 작품이었다.
어쩌면 그 아이들이 아니라 제가 죽을 수도 있었던 거잖아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었는데,
결국 그 아이들이 죽고 저는 살아 있는 세상만이 현실이 됐어요.
그래서 저는 이 현실에 책임감을 느껴요.
누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어떤 별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예요
선_ 처음엔 제목 때문에 약간 무서운 내용 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나 역시 <거기 까만 부분에>라는 작품이 제일 좋았다. (그러면서 가장 좋았던 구절로 '은'이 선택한 구절의 바로 다음 문장을 얘기했다) 약간 교훈을 주려고 하는 걸로 느낄 수 있지만, 독자에게 뭔가 되게 명확하게 얘기해 줘서 좋았다.
그러니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바라보는 것,
그것이 관찰자로서의 책임감이 아닐까요
광_ <여름의 마지막 숨결> 여름의 마지막 숨결이란 작품은 전형적인 10대 남자애들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며 단편의 맛을 잘 살린 소설이라고 느꼈다. / <너무나 많은 여름이> 작품은 분량이 가장 길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삶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작품이다. 거장병이 싫긴 하지만 그래도 읽다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것도 소설의 몫이라고 생각해서 이 작품 역시 소설다운 작품이었다.
번외3) '선'은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서 드러난 작가의 생각에 (걷기와 사랑이 노력 없이도 가능하다는 발언 등) 공감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에 '광'은 이 작품을 고른 이유로 작품 자체가 좋았다기 보단, 좋았던 면과 나빴던 면이 있고, 그게 소설의 역할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 줘서 좋았다고 답했다.
번외4) 반대로 가장 어려웠던 작품으로 '은'과 '선'은 <고작 한 뼘의 삶>을 골랐고, 그에 '광'은 기존 소설가들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단편이라고 생각했다고. 이야기가 나를 선택해 주는 거라는 이전 기성세대 소설가의 생각이 담긴 작품 같았다. / 그래서 우리 모두는 선택받지 못한 건가 하면서 우울해했고, 결코 공감하지 못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보일러>에서 나온 '정평호텔'은 존재하지 않지만, 할아버지는 존재했다며 그곳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듯 얘기한다. '은'는 읽으면서 그래서 그 정평호텔이 있었단 건지 없던 곳인지, 그 정평호텔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물어보았고, 만족스러운 답을 받았다.
선_ 그냥 말 그대로 인생을 통틀어 가장 따뜻한 밤이 있던 곳. 그 할아버지한테는 그냥 거기가 정평호텔이든 종평호텔이든 자기가 있었던 어떤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실제로 있었던, 없었던 상관없이 할아버지한테는 있었던 곳이지. 물리적으로 있건 없건 상관이 없다.
광_ 일단 정평호텔은 호텔의 모습으로 존재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작품 내에서 '정평호텔'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유토피아일 수도 있다.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지만, 가장 꿈꾸는 곳이니까. 또한, 할아버지가 평생의 질문 몇 가지를 계속하면서 살아갔는데, 그런 질문 중에 하나일 수도 있다. 자기 삶을 유지하기 위한 어떤 장치가 정평호텔이다. / 다른 작품과 연계해 보면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에 나오는 사람과 연결이 되었다. 이 작품에 나오는 신기철이란 사람이 정평호텔 그 노인이 아닌가? 신기철이란 사람이 아내의 죽음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서 자신을 분리하는데, 이 작품에서도 관광호텔 같은 걸 찾는다. 그래서 이 관광호텔이 정평호텔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도 해봤다. 자신을 분리한 것에 대한 대가가 정평호텔을 찾는 노인의 모습일 수도 있고.
결국, 정평호텔은 말 그대로 인생을 통틀어 가장 따뜻한 밤이었던 유토피아일 수도, 혹은,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에 나오는 캐릭터가 이 작품의 노인이 되어 현실의 기억과 자신이 바라는 기억을 분리한 채, 젖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찾은 게 정평호텔이지 않았을까?
번외5) 정평호텔이 의미하는 바를 질문한 것처럼 발제자 '은'은 이 책을 읽으면서 이해되지 않은 부분을 질문했고 '선'과 '광'은 자신들이 생각한 해석들을 얘기해 주었다. 그래서 '은'은 마치 과외받는 기분을 느꼈다. ㅎ
번외 5-1) <토키도키 유키>에서 할머니는 눈이 녹기 시작하자 젊은이의 시체가 나왔다고 했는데, 막판에 가서는 왜 때때로 내리는 눈과 마친가지로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행복이 오기는 온다는 게 연결이 안 된다는 '은'의 질문에 '선'과 '광'은 인간의 바람이나 어떤 삶이 그렇게 길지 않다고,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그게 길게 유지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라는 것. 잔인한 현실이 드러나는 순간도 있고, 눈으로 덮여서 되게 평온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도 있고. 행복이든 불행이든 길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짧게 짧게 계속 순환된다는 이야기. 보통 우리는 봄이 오면 행복이고 겨울이 오면 불행이라고 하는데, 그걸 반대의 이미지로 쓴 것이라 생각한다는 답을 해주었다.
번외 5-2) <풍화에 대하여>에서 책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새로운 내용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발언에 '은'과 '선'은 공감하지 못하였는데, '광'이 이해를 도왔다. '광'이 말하길,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게 점점 줄어든다. 왜냐하면 새로운 거에 도전을 많이 안 하고 경험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이 작가는 본인의 기준에서 이제 새로운 게 점점 줄어드는 것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나도 어떤 작품을 읽을 때 이거 어떤 패턴하고 되게 비슷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렇지만 '광' 역시 이 발언에 동의하진 않았다. ㅎㅎ
번외 5-3) <관계성의 물> 작품에서 말한 물 한 잔을 얻어 마시는 방법으로는 기-승-전-외모라는 답이 나왔다. 그냥 첫인상이, 선하게 생겨서 호감상이면 물 한잔 달라고 안 해도 그냥 물을 주고 싶어 진다고 ㅋㅋㅋㅋ
번외 5-4) 그 밖에 행동하는 나와 지켜보는 나에 대한 얘기부터 내가 죽고 난 뒤에 세계가 있다는 게 견딜 수 없다는 말이 뭔 소리인지, 통조림이 과거라고 말하는데, 그 구간에서 뭔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스파게티 인생론이나, 자신을 임신했을 때의 엄마를 보러 가고 싶다는 부분까지, 궁금하고 이해 안 되던 것들을 얘기하며 각자가 해석한 것들을 나눴다. (이것이 독서모임의 장점 ㅎㅎ)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질문에서 유독 '은'이 신나서 떠들었다고 한다.
광_ 20살 때부터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이 부조리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고 사람들의 얘기를 듣는 걸 좋아했다. 그게 구체적으로 말이 되든 말이 안 되든 그런 얘기를 듣는 걸 좋아했다. ( 이에 '선'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 세상의 모든 무기를 농기구화해야 한다고 답했다. 모든 군인들이 다 농부가 되는 거지. 모든 문제의 근원은 먹는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먹거리가 해결이 된다면 분쟁이 줄어들 것이다 / 그리고 '은'은 기분 좋아지는 생각에 대한 답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고차원적이어서 놀랐다고 한다. )
무튼, 이렇게 20대 시절을 보낸 '광'은 그 답으로 인공지능은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마르크스의 철학인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눈다는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유토피아라고. 그런 세상, 그런 세계관을 상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답했다.
선_ '광'과 같은데 극단에 있다. '광'은 그걸 AI에게 맡긴다 했지만, 나는 그걸 법 내지는 인간의 어떤 문화, 가치 정립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진정한 가치인가, 이상적인 가치가 사회에 뿌리내려진 그런 세상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은_ (고차원적인 답변에 유일하게 1차원적인 답을 내놓은 자) 저는 연말이 되면 연기대상, 연예대상 같은 시상식과 함께 연말을 맞이한다. 시상식을 보면 누구누구한테 감사하다며 수상소감을 말하는데 나는 그런 수상소감을 하는 꿈을 꾸면 기분이 좋다. 아무래도 작가라는 꿈이 있다 보니 매년마다 시상식을 본 후에 작가상을 받은 후 수상소감하는 꿈을 꾸는데, 꿈을 꾸고 나면 기분이 좋은 게 올 해에 내가 감사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을 알 수 있어서 좋다. 어느 순간부터 연말이 되면 난 왜 아직도 이 나이에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멈춰있지 하는 꿀꿀한 생각에 빠지게 되는데, 수상소감 꿈을 꾸고 나면 내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다.
이 답을 이후로 '은'은 프로드덕러(프로 드라마 덕후)답게 드라마 얘기를 엄청 했다는 후문이... 그렇게 기-승-전-드라마 얘기로 모임을 마무리했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 │ 김연수 지음
2024년 5월 25일(토) 오전 10:30
참석자: 광, 선, 은 (총 3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