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올레뜨, 묘지지기> 발레리 페랭
‘어떤 이야기는 길어서 행복하다… 우리에게 딱 하나씩 주어진 선물이자 눈물인, 자기 앞의 생.’
책 뒤에 실려있는 박연준 시인의 추천사다. 뭐든 쉽게 질리는 나를 은근 도발했다. 이런 카피에 홀려 집었다가 실패한 책들이 수두룩.. 반쯤 감은 의심의 눈으로 벽돌 두께(588p.)의 책을 집어 들었다. 두께와 어울리지 않는 팬시한 표지에는 흑단 같은 머리칼, 선홍색 입술, 송승헌 같은 눈썹, 플로럴 패턴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그려져 있다. 제목도 보통이라면 ‘묘지지기 비올레뜨’일텐데, <비올레뜨, 묘지지기>라니… 이름과 직업 중간에 쉼표를 넣은 테크닉은 무언가 기묘한 느낌을 주겠다는 편집자의 술책이겠으나 기꺼이 넘어가 준다. 재미범벅의 통속소설, 하이틴 로맨스려나…하는 편견과 기대로 첫 장을 넘겼다. 헛, 차례가 없다니..차례와 제목에서 기승전결을 파악하려는 속내를 간파당한 듯, 아무것도 예상하지 말라는 듯, 94개의 번호와 시구 같은 챕터제목이 이어지는 구조다. 실제로 이 책에 대한 공통된 의견은 반전의 반전의 반전이라 재미있었다, 두 개 이상의 장르가 혼재되어 예상치 못한 민트초코 같은 재미를 준다는 의견이 공감을 샀다. 두께 때문에 온라인 쇼츠와 릴스로 짧아진 집중력을 어떻게 끌고가려는 건지 내심 걱정했는데, 첫장부터 진지하게 낚시를 던진다. ‘오직 한 사람이 사라졌고, 이제 세상엔 아무도 없다.’ 뭔가 로맨스같은데 스릴러같은 느낌…. 프랑스 소설 주제에 뭐 이렇게 한글패치가 잘 되어 있는 거니. 프랑스 소설답지 않게(?!) 흥미진진했던 이 책을 섬북동 멤버들과 나눠보았다.
1.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감상, 혹은 한줄평
주 : 무덤에 얽힌 단편들이겠거니 하며 뻔하게 생각했는데, 통 장편이라 놀랐어요. 너무 재미있었고, 특히 엔딩이 좋았어요.
광 : 평가가 극과 극일 것 같다. 초반에는 뻔히 알 것 같은 분위기라 이거 어쩌지 했는데, 서스펜스가 등장하는 부분부터 급 흥미진진해져서 범인이 누군가 집중하며 나름 재밌게 읽었다.
매 : 전 완전 반대로 감정에 대한 설명을 상상하며 읽어서 재미있었어요. 진도가 안나가서 힘들었지만 전반적으로 재미있었어요. 오히려 추리 나오는 부분은 감정선을 깨뜨려서 좀 식상했지만..
경 : 이렌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고, 프랑스 소설의 재발견이랄까요. 묘지지기라는 직업에 대해 알게 되어 좋았고, 특히 사샤 캐릭터가 너무 좋았어요.
유 : 자식을 먼저 보낸 엄마는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는가에 대한 이야기. 폐인이었다가 사샤때문에 살아나게 되는 부분이 좋았다. 모든 예상을 빗나가서 재미있었다.
승 : 처음부터 좋았고, 잔잔하면서도 잔혹한 이야기라는 느낌. <모레>라는 소설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2. 각 장의 제목들이 드라마틱한데, 가장 마음에 닿았던, 인상적인 제목은?
주 : 다 좋았지만, 특히 25번 어머니의 사랑은 신이 단 한 번 내리는 보물이다.
광 : 다 별로지만 고르자면 28번 나눌 수 없는 고독일 뿐이다. 40번 할머니는 내게 별 따는 법을 일찌감치 가르쳐주셨어요. 밤에 마당 한가운데 대야를 갖다 놓기만 하면, 발아래에 별이 가득해져요.
매 : 83 사람들에겐 저마다 다른 별이 있어.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별은 안내자야, 또 다른 사람들에겐 그저 작은 빛일 뿐이지 (생텍쥐베리, 어린왕자 중)
경 : 53 내 죽음에 울지 마요. 내 생을 기념해주세요.
정 : 다 싫어. 오글거려. 그렇지만 꼽자면 59 나무가 쓰러지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 크기를 헤아린다.
85 나의 관 주변에 머물며 울지 마요, 나는 거기 없어요, 난 잠들지 않았어요. 나는 흔들리는 천 개의 바람이에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시 ’거기 있지 마요’, 우리에겐 임형주가 부른 ‘천개의 바람이 되어’로 많이 알려져 있다.)
승 : 29 나뭇잎들이 떨어져 내리고, 계절이 지나간다. 오직 기억만이 영원하다.
윤 : 19 네 생각을 할 때마다 꽃이 한 송이씩 피어난다면, 지상은 거대한 정원이 될 거야.
3. 이 소설 속에서 가장 안타까운 인물은?
주, 매 : 비올레뜨, 삶 자체가..
유 : 준비에브 마냥, 인생이 비참함 그 자체다. 성폭행에, 쓰레기 같은 남편에, 마지막 선택까지..
뤼크(외삼촌)라는 인물도 조카와 와이프의 관계를 알았을 것 같다.
경 : 투쌩, 마마보이였으나 범인을 알고 난 그의 심정은 감히 헤아리기가 힘들다.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비극적 인생이다.
광 : 신부님, 아이를 좋아하지만, 가질 수 없는 신분, 못 낳아서 안타깝다
은 : 투쌩, 레오닌(딸)- 이 비극의 순수한 희생자
윤 : 범인 (세상 쓸 데 없는 삶을 살다가, 처음이자 마지막 딱 한 번 쓸 데 있어보려고 의지를 낸 일이 하필…)
4. 만약 묘지지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하겠는가? 연봉은 어느정도가 적절할까?
(아무도 하지 않겠다고 해서 연봉을 10억으로 올려 봤다.)
주 : 그래도 Nope. 무섭다. 특히, 고양이, 개 완전 싫어하고 무서워함.
승 : No, 무섭고, 내내 (직장에)붙어있어야 해서 싫음.
매 : ok, 그러나, 근무외시간, 야근은 용납할 수 없다. 인형을 치워야 한다는 조건도 붙는다.
경 : No, 묘지지기의 집은 모두의 집이다. 특히, 유가족을 대하는 일은 너무 어려운 일일 것 같다.
유 : No, 공원을 가꾸는 일, 공간관리에 잼병이라 불가능한 직업.
광 : No, 똑 같은 이야기 듣는 거 너무 싫어한다. 다 비슷비슷한 사연이지 않나.
윤 : 이렇게나 제각각의 이유라니...
5. 자신의 묘비명을 적는다면?
유 : 하루키의 묘비명이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마라톤)라는데 빗대어
나는 '적어도 끝까지 걸었다.'로 하겠다. 걸었다에는 '일했다, 살았다' 등 여러 의미가 포함될 수 있다.
주 : 챕터 제목 53 내 죽음에 울지 마요, 내 생을 기념해주세요. 87 어떤 회한도 없다. 어떤 후회도 없다. 충만하게 살다 가는 삶이다. 가 마음에 든다. '후회없는 삶'이었다는 글을 쓰고 싶다.
경 : 묘비를 남기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남겨야 한다면 “이만하면 됐다.” 정도?
광 : 예전에는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엥?”’이었는데 바꿨다. ‘열역학 제 2법칙, 엔트로피의 증가’로.
--> 윤 : 무슨뜻인가? --> 광 : 자연스러운 거다, 라는 뜻 --> 정 : 끝까지 허세 ㅋㅋㅋ
매 : 끝까지 미완성
승 : See you soon , 김숙 ‘한판 잘 놀다 갑니다.’ 라고 하겠다는 말이 떠오른다.
6. 자신이 가본 최고의 묘지는? (다분히 묘지콜렉터인 '유'를 향한 질문)
유 : 바르셀로나 공동묘지 몬주익(Montjuic, 유대인의 산 mont + juwish), 바로 앞이 바다다.
커다란 벽에 들어있는 납골당이 인상적인데 요즘 한국의 추모공원도 여기를 따라한 곳이 많이 보인다. 나중에 바다가 보이는 곳에 묻히고 싶다. 또, 얼마전 세상에서 제일 큰 십자가(152m, 참고 : 브라질 리우 예수상 38m)가 있다는 '전몰자의 계곡'에 다녀왔다. 스페인 내전 전사자를 위한 무덤이라는 명목으로 후원을 받아 만들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스페인 독재자 프랑코 자신을 위한 무덤이었다고 한다. (현재 프랑코 유해는 이전된 상황이라고)
경 : 몽마르뜨 묘지, 철학자와 명사들이 다수 묻혀 있다고 (에밀 졸라, 드가, 베를리오즈 등)
페르 라세즈 묘지도 생각난다. 쇼팽, 짐모리슨, 오스카 와일드, 마리아 칼라스, 이사도라 덩컨 등이 묻혀있다.
매 : 아르헨티나 묘지 (찾아보니 부자들의 묘지-레꼴레타 인듯, 에바 페론이 묻혀 있다고 함)
우리 할아버지 모신 공원묘지 - 마음이 편해진다.
승 : 현충원, 벚꽃놀이 숨은 명소라고
주 : 없음. 기독교라 제사가 없는데 언젠가 가족 장례 때 나를 굶겨서 안 좋은 기억이 있다.
그 외 기타 질문
* '외도는 용서못해도 사랑은 용서하는' 프렌치 애정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은?
내가 하면 로맨스, 환승 ok!, 양다리는 놉, 끝내고 가야지. 아무생각없음 등의 의견이 있었다.
그 외 기타 의견으로
- 한글 번역이 참 잘되었다.
- 천혜의 묘지 정원, 우연과 자연이 호의로 의기투합한 것 같다는 '묘지지기의 집'을 가보고 싶다.
- 비올레뜨가 읽은 ‘신의 작품, 악마의 몫’이라는 책은 국내에는 ‘사이더 하우스’라는 제목의 영화로 소개됨
- 이 책이 연극으로도, 영화로도 진행 중 이라는 정보
- 발레리 페랭의 번역된 책이 이 한 권 뿐이라 아쉽다.
이 책의 프랑스어 원제는 Changer l’eau des fleurs (꽃병에 물 갈아주기)이다. 꽃병에 물을 갈아주듯 죽음에서 삶으로, 생명으로, 자기 앞의 생을 향해 나아가는 방법은 결국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이야기. 그러나, 하루하루 버티는 감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생명력 가득한 자연과의 교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다정한 이웃들, 현재를 지키는 자신만의 루틴을 만드는 방법, 무엇보다 머리 위 가로등을 켠 듯 나를 환히 밝히는 목소리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필요한 것이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에도 결국 사랑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그 흔한 샴푸향 같은 진리는 언제 만나도 기분이 좋다.
P.S. 역시 리뷰는 모임 직후에 써야 한다. 녹취도 없이 한 달이 훌쩍 넘은 기억력만으로 쓰자니 왜곡과 망각의 대잔치다. 혹시 기억과 기록의 오류가 있다면 너그러이 양해를 바란다.
시간 : 2024년 5월 11일 토요일 오전 10시반
장소 : 을지로 3가 역, 카페 느티
참석 : 윤, 주, 광, 매, 경, 유, 승